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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연 Apr 02. 2024

피해자는 억울할 시간이 없다

휴대폰을 바꾸다 명의도용 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어는 흐르는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다. 가수 강산에가 부른 노래 가사에 따르면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인간은 때때로 기억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다. 연어처럼 신비한 이유라도 있다면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며 기억할 계획이라도 세웠을 텐데, 최근 몇 주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해야 했던 날은 그렇지 않았다. 기억과 기록이라면 자신 있는 편이지만 그 기억이 기록조차 없이 희미하고 조잡하게 나뒹구는 로우 데이터일 땐 차라리 신비한 이유로라도 강을 거슬러 오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쯤, 퇴근하고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바꾸러 갔다가 내 명의로 개통된 태블릿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 기기의 요금이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것도. 사고회로가 정지된 내게 새 휴대폰을 개통해 주던 직원은 조심스레 말했다. 모르셨어요? 예전에 다른 데서 휴대폰 바꾸시던 날 태블릿도 개통되었네요.


“정말 기기 받으신 적 없으세요?”

늦은 저녁 둘만 남겨진 넓은 휴대폰 가게에 울리는 낮은 중저음 목소리에 어쩐지 무게가 실려 순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심판대에 선 용의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요금을 내고 있었다고요? 갤럭시 탭을 누군가 삼 년 반 동안 쓰고 있었다고요? 번호를 알 수 있나요? 계약서 좀 볼 수 있을까요?


만져 본 적 없는 갤럭시 탭과 본 적도 없는 사기꾼의 음흉한 그림자에 압도당해 새로 산 휴대폰의 존재는 묻힌지 오래. 아무리 삶이 무료해도 이런 이벤트에 끼어들긴 싫었다고. 얼른 범인을 잡아 벌주어야겠다는 전투력보다 사건에 휘말린 당사자라는 사실이 버거웠다. 이걸 해결하려고 쏟을 에너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로해졌다.


아무튼 휴대폰 가게에서 알게 된 건, 태블릿 계약서에 서명된 내 이름 세 글자는 내가 쓴 게 아니었을뿐더러 내 필체를 따라 쓰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은 타인의 성의 없는 흔적이었다는 것. 과거 휴대폰을 살 때 가입한 요금제 항목에 태블릿 요금이 통합되어 있어 당사자가 모를 법한 구조였다는 것.  


출근하자마자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신고를 요청했다. 받은 적 없는 기기가 개통되어 있었고, 요금을 내고 있었다. 명의도용 당했습니다. 상담사는 건조한 억양으로 기기를 들고 지정 지점에 방문하라고 했다. 기기가 저한테 없다니깐요. 모르는 이에게 저절로 짜증이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신분증만으로도 신고가 가능하다는 대안은 들었지만 계약서를 메일로 보내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했다. 권한이 없다는 황당한 사유였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음에도 기계만큼 동요 없던 무심함이, 고객센터에 전화만 하면 조금이라도 해결될 줄 알았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주었다. 전화를 끊고 서러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는 너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아. 10년 넘게 쓴 충성 고객이라고 vip까지 달아줬으면서. 좋아한 적도 없는데 비참하게 차여버린 기분.


이후 며칠은 전투력도 상실해 그저 피곤하고 멍하기만 했다. 그 사이 창과 방패처럼 기억을 왜곡하려는 자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며 근거를 찾는 자아가 맞섰다. 창의 자아가 ‘너 바보같이 태블릿 사놓고 까먹은 거 아니야?’ 하면, 방패 자아는 ‘그걸 까먹기엔 작년에 피아노 악보 핑계로 사들인 아이패드를 너무 소중히 여기고 있잖아.’ 했고. 창이 ‘네가 몇 년 전에 쓰다가 팔아버린 태블릿 말이야. 그거 갤럭시 탭이었지?’ 하면 ‘그건 아이패드야. 펜슬까지 줬잖아.’ 하며 방어하는 식이었다.


나는 계속해 나를 의심하고 증명했다. 내가 기억하는 삼 년 반 전 그날은 휴대폰 데이터를 옮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몇 시간이나 휴대폰 가게에 내 휴대폰을 방치했던 것과 쌀쌀한 날씨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기억뿐이었다. 평소에 기록 잘하고 살면 뭐 하나, 기억으로 뭘 증명할 수도 없는 건데. 기억이 과거를 거슬러 오르다 어처구니없이 갤럭시 탭을 사고 좋아하는 내 모습이 떠오르기라도 할까 두렵기도 했다. 자괴감과 한심함이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고 정체불명의 태블릿이 혹여 범죄용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재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 가해자가 된 나와 내게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장면까지 상상되어 자책을 하다 일기장에 사기꾼 욕을 한 바가지 썼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행동 게시를 하기로 했다. 신고는 평일 오후 다섯 시까지만 가능했으므로 점심시간, 밥을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십여 분을 타고 도착한 신고 지정 지점의 낯선 직원에게 피해 사실을 다시 호소했다. 그가 내어준 종이에도 꼼꼼히 적어냈다. 그는 전문 업체에 피해 사실을 전달할 거고, 업체에서 명의도용 여부를 판단할 예정이라고 했다. 언젠가 업체에서 고객님께 전화를 할 건데 세 번 이상 못 받으면 신고는 무효로 돌아갈 거라고도. 끝이 아니다. 걸려올 전화번호가 무엇인지 모르니 지역번호 02로 시작하는 전화는 모두 받으라는 미션까지 받고 나왔다.


그리하여 선거철 여론 조사로 걸려오는 몇 십 통의 전화를 기대하며 받고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다. 회의 중 걸려온 전화를 놓치기라도 하면 회의를 마치고 다시 전활 걸어 여론 조사 전화였음을 확인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참으로 성실한 피해자가 아닐 수 없다. 기어코 기다리던 신고 업체와의 통화에서도 나는 나의 억울함을 또다시 공들여 설명했다. 얼른 그의 입에서 이 사건은 명의도용한 것이 맞는다는 결론을 듣고 싶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더 부지런해야 이 사건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신고 업체가 해당 대리점에 연락해 보겠다고 한지 일주일이나 지나고, 담당 직원과 연결해 주겠다는 업체의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삼 년 반 전 내 신분증을 도용하고, 서명을 위조한 직원과 연결되었다. 그는 당시 내 서명을 대필한 것은 맞지만 명의도용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갤럭시 탭 모델명이 적힌 계약서는 유심 계약서였다고. 나는 몇 년 전 그들이 서비스라며 유심 하나를 휴대폰 박스와 함께 넣어주었던 쇼핑백을 기억해 냈다. 고소하겠다는 내게 그는 코웃음을 쳤다. 선심 쓰듯 내가 낸 요금만큼의 금액을 보상해 주겠다고 했다. 고객님께 전화번호가 한 개 더 개통된다는 사실을 고지 못한 잘못은 있지만, 유심을 받지 않으셨냐며 반성의 기색 없이 비아냥거렸다.


신고 업체 담당자 말에 따르면 나처럼 유심 계약서로 인해 전화번호가 추가 개통되어 신고가 접수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사문서를 위조한 것은 맞지만 끝까지 대응하는 피해자는 별로 없다고, 대부분 똥 밟았다 생각하며 겨우 요금 정도만 보상받는 불리한 합의 후 신고를 철회한다고 한다. 알 것 같았다. 명의도용 사실을 알게 된 지 한 달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 듣고, 겨우 코웃음 치는 것을 보려고 시간과 노력을 쏟은 게 아니었다. 더 이상 나의 체력을 소진해 가며 뻔뻔한 사기꾼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누적된 피로가 몰려왔고 남들이 그랬듯 신고를 철회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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