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8. 07. - 08.
8. 평대 모살코지
김녕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털레털레 돌아왔던 경험을 거울삼아 이번에는 동쪽으로 떠나기 전 미리 숙소를 구했다. 나름의 기준이 있었는데 바닷가에서 한 잔 할 수 있고 만장굴과 비자림을 경유하는 990번 버스가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녕, 평대, 세화가 후보였다. 가보지 못한 바다로 가고 싶어서 평대리에 집중했다. 25,000원이 넘어가지 않는 선의 파티를 하지 않는 조용한 곳. 한옥을 그대로 살린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평대 모살코지였다.
그 전 날, 용수리 친구 집에서 밤늦게까지 놀다 버스를 놓쳤다. 계획에 없던 1박을 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었지만 만장굴과 비자림이 눈앞에 아른아른.. 박차고 길을 나섰다. 용수리 충혼묘지 정류장에서 702번 서일주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을 달려 종점인 신서귀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 집에서 얼른 채비를 다시 꾸리고 아까 내렸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701번 동일주 버스를 탔다. 동쪽으로 2시간 20분을 달려 평대리에 내렸다. 하루 만에 제주 반바퀴를 돌았다. 아직 숙소에 도착하기 전인데 평대모살코지 오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손님이 혼자인데 저녁은 어떻게 하실래요?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드실래요?”
우연이 어디까지 나를 데려갈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그래요.”
평대초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마을을 구경하며 걸었다. 평대 바다에 조성된 동쪽의 작은 어촌 마을. 관광지의 모습은 전혀 없고 오랫동안 마을을 지켰을 정자와 그늘이 큰 나무, 오순도순한 현무암 담장의 전통가옥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 왔음에도 그립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도착했다.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계셔서 인사를 하면서 모살코지가 여기냐고 여쭤봤다. ‘응~ 주인 저기 있어’ 라며 태평하게 갈 길을 가셨다. 뒤뜰에서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18세기 유럽인같은 원피스와 앞치마를 두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성이 나타났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데리러 가려 했는데 벌써 왔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평대모살코지의 주인 한아와의 첫 만남이었다.
툇마루와 서까래가 살아있는 집. 시골에 있는 친가, 외가 모두 신식 건물로 증축을 한 터라 그립고 반가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저녁시간이 가까워 식사 하러 바깥채로 향했다. 나무줄기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와인 바와 감각적인 그림들이 장식되어있는 근사한 카페였다. 탁자에는 턱수염이 가지런히 난 무뚝뚝해 보이는 남성이 앉아있었다. 둘 다 말없이 눈인사를 했다. 낯선 곳, 낯선 타인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침묵과 거리가 알맞게 주어져 있었다. 한아가 술과 함께 닭볶음탕과 여러 음식들을 내왔다. 먹고 마시며 가볍게 이야기를 곁들였다. 적당히 불편하지만 적당한 편안함으로 서서히 모살코지에 녹아들었다.
서른, 내 나이를 3학년 새싹반이라고 표현한 한아가 자신은 4학년 새싹반이라고 소개했다. 살면 살수록 삶이 어려워진다는 기분은 매번 느끼지만 나이 듦이 도전이라는 뉘앙스가 될 줄이야. 제주 생활 7년차, 게스트하우스는 올해 처음 오픈했고 자신이 이런 공간을 운영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는 한아의 사연에 푹 빠져들었다. 그림과 음악, 춤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것은 곧 한아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영갑, 이중섭은 과거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순간 생생히 살아있었다.
밤바다를 보고 싶어 홀로 산책을 나왔다. 평대리 해수욕장. 보름달에 가까운 동그란 달이 점점 떠오를수록 바다도 함께 차올랐다. 물결이 잔잔해 파도와 술래잡기하기 딱 좋았다. 발끝 살랑이는 파도가 갑작스레 덮쳐오면 재빠르게 뒤로 물러선다. 바다를 희롱하며 후퇴하는 놀이가 재미있어 해수욕장 끝까지 밀려나는 줄 모르고 놀았다. 수평선 가득히 한치 잡이 배가 밤바다를 회색으로 밝히고 있었다. 술 한 잔 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생각이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내면이 너무도 시끄러워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혼자이기에 들을 수 있는 소리.
한아가 찾으러 와서 모살코지로 돌아왔다. 술자리를 이어서 한층 더 내밀한 대화로 서로의 세계를 공유했다. 내가 살고 싶은 모습 그대로를 살고 있는 사람. 길 잃은 배가 등대 불빛을 발견한 것 같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하룻밤 머물렀지만 인연은 이제 시작일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2017. 08. 07. - 0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