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8. 08.
9. 만장굴과 동굴의 비유
덥다 못해 따갑기까지 한 폭염이 지속되고 있었다. 겁 없이 돌아다니다가 갓난아기 이후로 나본 적 없는 땀띠를 경험한 이후로 자중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갈 때는 긴 바지와 겉옷을 준비했다. 한여름에는 춥고 한겨울에는 덥다는 만장굴.
두더지굴이나 토끼굴을 확대해 놓은 것 같은 입구였다. 위장을 싸늘하게 만드는 바람이 굴 안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온도차이가 얼마나 큰지 입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시원하니 살 것 같네! 감탄하며 들어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역시나 추웠다. 준비해온 겉옷을 걸쳤다. 춥다고 몸서리치는 얇은 여름옷 차림의 관광객들 사이에서 우쭐해하며. 여름에는 무조건 만장굴이구나 싶었다.
강원도의 석회동굴은 많이 가봤는데 용암동굴은 처음이었다. 오밀조밀 율동감 있는 석회동굴과는 달리 산을 통과하는 터널 같았다. 뻥 뚫린 넓은 통로가 이어졌다. 이렇게 넓은 굴이 용암이 흘러서 생긴 공간이라니. 얼마나 많은 양의 용암이 흐른 것인지 놀라웠다. 가뭄이 든 논처럼 쩍쩍 갈라진 검은 용암 바닥을 걸으니 마치 거대한 공룡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개방구간 끝에 도착했다. 큰 용암석주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도나도 구경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약 7.6m의 세계적으로도 큰 용암석주. 검은 용암이 흘러나와 굳어진 기둥. 그렇구나.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예의 상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인공으로 설치해 놓은 조명에 사람들 그림자가 져 있었다.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카메라를 든 사람들, 구경하는 사람들. 그림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다리가 여덟 개인 괴물이 되었다가 지네가 되었다가 낙타가 되었다. 그림자와 사람들은 별개였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떠올랐다. 함께 온 사람들과 이 순간을 기록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람들. 자신들의 그림자가 플라톤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동굴에 묶여 자신들과 사물들의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진짜라 믿는 죄수들 같다. 나 또한.
인공조명이 만장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걸어오는 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 만장굴의 진짜 모습은 이렇게 밝은 내부가 아니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캄캄한 굴에 인공적으로 조명을 설치해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조명을 통해 본 만장굴이 진짜 만장굴일까. 만장굴의 무엇을 본 것일까.
조명에 따라 사람들의 그림자는 왜곡되었다. 세상 모든 것들로 변신하는 그림자. 그림자를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 그것들이 과연 진짜일까.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인가. 진실을 알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일까. 또 나는 어떤 그림자를 보고 진실이라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지러운 마음을 눌러 담으며 만장굴을 빠져나왔다.
2017. 08. 0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