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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Jun 21. 2018

광복절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8. 15. 

13. 광복절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날씨가 흐린 광복절 아침이었다. 관광객이 더 몰려들겠구나. 조용한 곳에 가고 싶었다. 김영갑 갤러리 생각이 났다. 서귀포와 삼달은 같은 남부지만 버스로 2시간이 걸린다. 뻔질나게 드나들고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가게 됐다. 지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2025년 예정인 제주 제2공항이 삼달 바로 옆에 있다. 김영갑 선생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분노하셨을까. 개발되는 중산간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분인데. 제주의 고요와 평화가 깃든 두모악이 비행기 소리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그분이 견딜 수 있을까. 그분의 핑계를 대어 빌어본다. 제주가 더 이상 개발이 되지 않기를, 사람들이 더 이상 붐비지 않기를.



  아늑하고 정감 있는 정원, 분교 시절 운동장이었을 잔디밭, 제주의 속살을 담은 사진들, 그대로 보존해 놓은 선생님의 작업실, 뒤뜰이 내다보이는 무인 카페.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사랑스러운 두모악. 사진전만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두모악 안팎을 모두 구경한 뒤에야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옥상에는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 김영갑 선생님이 갤러리 옥상에 지인들을 데리고 올라가 삼달 앞바다를 보여주곤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삼달에 숙소를 잡아 바다와 마을을 구경하고 갤러리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삼달교차로에서 걸어서 20분. 꽤 내륙에 위치하고 귤 밭을 둘러싼 나무들도 크고 울창해서 바다가 보일 것 같지는 않은데. 김영갑 선생님과 친구들이 봤다는 풍경이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과 <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 전(展)이 진행 중이었다. 나무 몇 그루 펼쳐진 지평선에 구름이 널려있는 사진들. 가까이서 보다가 전시장을 나오기 전 전체적으로 다시 봤다. 멀리서 사진들을 나열해놓고 보니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같은 장소라고는 믿기지 않는 햇빛, 바람, 구름의 마법. 어느 사진만을 선택할 수 없다. 흐름과 변화, 그 모든 순간이 진실이고 황홀이다. 구름에 대해 김영갑 선생님이 쓰신 글귀도 인상 깊었다. 


  “루게릭을 몰고 온 구름 역시도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오늘 견뎌내야 하는 육체적 통증으로 내일이면 또 다른 통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제 견뎌낸 통증은 오늘과는 또 사뭇 달랐다. 그동안 내가 보았던 구름들, 내 안에 흐르고 있는 구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고 있다. 내 안에 흐르는 구름은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한다. 그 변화를 지켜보며, 그동안 내가 보았던 구름들을 떠올리며, 나의 내일을 가늠해보곤 한다. 내 안에 흐르는 구름이 내일은 세찬 장대비를 몰고 올지, 아련한 가랑비를 몰고 올지, 혹은 자욱한 안개를 몰고 올지 참으로 궁금하다. …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언제까지나 당당하게 싸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동안 구름을 지켜보면서 구름이 내게 가르쳐준 처방이다. … 어느 날인가 태풍 루게릭을 몰고 온 먹장구름이 서서히 물러나길 의연히 기다리리라. 태풍이 물러난 뒤의 파란 하늘과 고요, 그리고 평화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이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시련이라는 것을 알기에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리라.”

-생의 봄날을 향한 고행中(글 김영갑, 출처 김영갑갤러리두모악 http://www.dumoak.co.kr)


김영갑,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 展


  “살아가면서 불현 듯 내게 다가오는 권태로움과 우울, 울적함이 내 삶의 리듬을 흐트러뜨릴 때면 나는 그곳에서 풀과 나무와 구름과 싸우고 화해하는 가운데 나의 어리석음을 돌아봅니다. 참기 힘든 분노, 좌절, 절망이 나를 힘들게 할 때면, 나는 나만의 비밀화원에서 눈, 비, 안개, 바람에 젖고 시달리는 축복을 통해 하찮은 내 존재를 다시금 확인합니다. … 한 달씩 계속되는 궂은 날씨나 가뭄에도, 연약한 야생초들은 끄떡없이 생명을 이어갑니다. 숨쉬기조차 버거운 바람에도 억새는 몸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강한 바람과 당당히 맞서 언제나 승리합니다. 키 작은 야생초와 몸집 작은 곤충들은 나에게는 없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찮게만 여겼던 그들에게는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들만의 탁월한 삶의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사유능력과 문화를 지녔기에 만물의 우두머리라고 우쭐댑니다. 하지만 그 하찮은 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혹독한 생존경쟁 속에서도 의연하게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나의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속에서 저마다의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생각할 때, 그 위대한 대자연의 질서 앞에 그저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잃어버린 이어도 中(글 김영갑, 출처 김영갑갤러리두모악 http://www.dumoak.co.kr)


김영갑, <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 展


  그처럼 나도 아름다움을 남기고 갈 수 있기를. 


2017. 08. 1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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