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nergist Feb 23. 2021

공기의 밀도와 대화의 농도

뻥뻥 뚫린 구멍을 메워주는 걸쭉한 대화가 필요하다


00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대학교 1학년 1학기는 그야말로 술 게임과의 동고동락이었다. 술은 그저 술로서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술 게임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학교 앞에 위치한 대형 술집들은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풍년을 맞이한 논밭이면서 동시에 전쟁터였을 것이다. 나는 3박 4일간 지방 어디론가 떠난다는 새내기 OT에 가지 않아서 학교생활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수강신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겨우겨우 온라인에서 학과 클럽을 찾아냈다. 급히 가입한 클럽에는 입학 전 새내기와 선배들이 만나는 자리를 준비했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고, 달력을 뒤져보니 다행히 알바 일정이 없었다. 새롭게 시작할 대학생활이 궁금했고 동기들 선배들 얼굴도 좀 익혀놓으면 좋겠다 싶어서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수강신청 정보는 개뿔, 술 게임을 먼저 알아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겠구나'라고 중얼거려야 했다. 이미 OT와 수차례의 술자리를 통해 게임에 익숙해진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눈치껏 열심히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다가 박수를 받고 영문도 모른 채 술을 들이켰다. 어림잡아 100명은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술기운에 달뜬 얼굴로 꽥꽥 소리를 지르며 웃어댔다. 잠시 화장실에 가려 자리를 떴다가 담배를 피우러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로 혼잡한 복도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며 '이 카오스가.. 대학생활의 시작인가?' 싶었다.


그 카오스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탐색에 탐색을 거쳐 새로운 무리를 지었다. 운 좋게 나도 많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어찌어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근처에 사는 친구 두 명이 주말에 집 근처 번화가에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낮 시간엔 수업 듣고 해가 지면 술 게임하고, 막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발간 얼굴로 자다가 서로 깨워주고 내리면서 가까워진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아서, 이번 주말을 계기로 더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일 저녁 100명이 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꽥꽥거리며 술을 먹다가 셋이 있자니 왜 이렇게 어색한 기운이 흐르는지. 값싼 안주를 앞에 두고 한참 맥락도 의미도 없는 말을 떠들던 우리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한 친구의 제안으로 술 게임을 시작했다. 대학가 술집에서는 아주 익숙했던 게임 소리가 동네 술집에서는 어색하게 허공을 떠돌았고.. 결국 우리는 얼마 되지 않아 술 게임을 중단하고 술을 퍼부어 발개진 얼굴로 거리를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술 게임이 너무너무 싫었다. 처음엔 호기심 반 사회성 반으로 열심히 하긴 했지만, 너무 시끄러웠고 매일 똑같은 게임을 하는 것도 지겨웠다. 하기 싫어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타깃으로 자주 지목당했고 결국 술을 많이 마셔야만 했다. 그땐 간이 팔딱팔딱해서 술 먹는 건 괜찮았는데 그게 게임에 진 벌칙이라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둘러앉은 테이블에 사람이 바뀔 때마다 또 몇 판의 게임을 해야 했고, 그게 모르는 사람끼리 어색함을 깨고 친해지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 이상했다. 술 게임 말고는 친해지는 방법이 없나? 나처럼 술 게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저녁 모임에서 빠지거나 적당히 눈치를 봐서 조용한 테이블로 옮겨가곤 했다. 어느 날 또 화장실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도착한 조용한 테이블에서는, 학과 대표를 하는 3학년 선배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 너흰 왜 이 과를 선택했니?


잠시 '아 이런 진지충, 술 게임이 낫겠는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는 술 게임 대신 사람들과 친해질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이 선배는 비록 교수님이 할 법한 질문을 하지만 어색함을 뚫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잖아? 내겐 대화가 필요했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색한 기운을 풀기 위해, 진지한 이야기를 위해 술이 필요할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술 게임은 나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서서히 저녁 술자리 참석을 줄였고, 그 선배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과 수없는 대화를 하며 많은 것들을 나눴다. 






이듬해부터는 혼자 훌쩍 떠나기를 즐겨하며 더 많은 대화에 참여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처음 보는 사람들과는 더욱 질 좋은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다. 서로가 가진 생각과 가치관이 어떠한지 전혀 기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대화는 엄청난 배려심을 필요로 한다. 불편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대화를 진행시켜야 한다. 혹여나 의견이 다를 수도 있지만 괜찮다. 이 일시적인 관계, 금방 떠나갈 사람을 붙잡고 내 생각과 의견을 이해시킬 필요가 없다. 혹시나 마음이 잘 맞으면 또 하나의 좋은 친구를 얻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부담 없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심리학에는 이와 관련해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주변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 제삼자에게 비밀이나 개인사에 대해 더 잘 털어놓을 수 있고, 듣는 이방인 또한 걱정이나 부담 없이 가볍게 공감이나 조언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Late Night Conversation, 늦은 오후부터 시작해 밤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대화를 사랑한다. 서로 대화에 몰입하고 그 고민의 깊이가 심해를 향할 때 나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곳, 시간의 흐름도 더뎌지는 곳, 마음속 왠지 모르게 텅 비어있던 구멍들이 채워지는 곳 같다. 친구들과 시원한 맥주를 손에 들고 창밖 도시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침대에 누워 흐릿한 창문 밖을 바라보며, 여행자들과 둘러앉아 짙푸른 하늘에 총총 박힌 별을 바라보며. 좋은 음악은 감정에 결을 더하고, 맛있는 음식과 술은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가끔씩 찾아오는 침묵은 더 이상 깨야 할 어색함의 순간이 아니라, 함께 있는 동시에 따로 떨어진 존재들의 고민이 유영하는 것 같다. 그렇게 대화의 농도는 점점 짙어진다.


<Soul>


최근 디즈니 신작 <소울>의 한 장면. 조의 모습을 한 22가 이발소에서 고단한 인생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것에 대해 쉬지 않고 입을 나불댄 덕분에 처음으로 이발사 데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가족을 위해 수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이발사가 된 데즈. 나가는 길,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반가웠다는 데즈의 말에 22가 묻는다.


- 어쩌다.. 우리 이런 대화를 한 번도 안 한 거지?

- 그야 네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으니까!


조는 22에게 저 이발사는 항상 재즈 이야기만 한다고 했지만, 그건 자기 자신이 재즈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나 일터의 동료들, 매일 마주치는 아파트 경비원, 버스기사나 이마트 직원들과 피상적인 이야기들만을 한다. 매일 똑같은 대화, 내가 하고 싶은 말, 그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대화를 한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이 가진 이야기에 대해 질문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사실은 그럴 에너지와 여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일로 마주치는 사람들, 깊은 관계가 아닌 사람들과는 그런 얘기를 삼가야 괜히 불상사에 엮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조금만 친해지면 '가족같이' 사람을 부려먹거나 공공연한 뒷말이 도는 조직문화에서는 사람들과 너무 깊게 얽혔을 때 발생하는 불편함도 분명히 있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실이다. 


거기에 마스크의 시대가 찾아왔다. 마스크 아래서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도 없고 못된 상사 욕을 입모양으로 마구 해도 괜찮다. 하지만 비말의 차단과 함께 대화도 차단 명령을 받은 것 같다. 최소한의 눈짓과 단어로만 대화하는 일이 늘었다. 거리두기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영상통화나 메신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끔찍하지만, 서로의 눈빛과 목소리가 시간과 공간을 울리며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도 동시에 존재한다.





Unsplash @harlimarten


많은 대화를 시도한 만큼, 대화가 되지 않는 경험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 내 발화에 대한 반응의 개념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을 끊고 들어오는 사람, 모든 소재를 자기중심으로 돌리는 눈치 파괴자(혹은 나르시시스트), 모든 일에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라며 상대의 경험을 폄하하는 거만형, 혐오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사람, 남 이야기하기를 즐기고 모든 대화를 험담으로 끝내는 이, 어떠한 논리에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앵무새 인간 등.. 안타깝게도 이들은 내 인생에 잠시 찾아왔다 떠나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불청객들이었다. 기본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지면 나는 자연스럽게 말수를 줄인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다 보니 정서적 교류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허공에 떠다니는 자음과 모음이 그저 뚫려있는 내 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는 원래도 먼저 대화를 시작하거나 친구를 찾아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사람 만나는 걸 주저하게 됐다. 남들이 나에게 관심을 주는 만큼 내 감정을 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끔씩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이 어떻든 내 마음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가랑비를 맞듯 서서히 스며들고 젖어가는 대화를 하고 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요즘은 모두가 말하기보다 듣기를 강조한다. 상대가 하는 말의 핵심을 찾고 그에 반응하고 공감하고 내 이야기를 덧붙여나가는 과정은 대화의 결을 고운 빗으로 빗어주는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인터넷 설치 기사님과도, 지루한 회의 시간에도, 막 데이트를 시작한 상대와도. 마스크와 투명 아크릴 가림판으로 우리 사이에 장막이 한 겹 두 겹 쌓이며 어쩔 수 없이 단절된 느낌이 들더라도 그런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너무 진지한 얘기만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철학적이지도 않고 정치 경제에 대한 상식도 부족하며 이런저런 사회문제에 아주 얕은 관심만을 둔다. 결과물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대화를 할 만큼 생각의 폭이 깊지 않다. 아주 대단한 얘기가 아니어도 좋다. 그냥 웃고 떠드는 보통의 대화에서 조금만 각을 비틀면 질문이 나오고 마음속 어딘가 담아두고만 있던 이야기가 머리를 내밀기도 한다. 그때 그 3학년 선배를 보고 '진지충' 이라며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에 대해 벌레라는 칭호까지 붙이는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이제는 공기의 밀도와 대화의 농도는 비슷한 관계에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그저 짙은 대화의 농도를 통해 각자가 가진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며 새로운 발견을 해 나가고 싶다. 이를 통해 내 작은 세계를 확장시키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No thanks에서 Yes please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