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아무거나는 없다
그 대화는 어느 화창한 날 점심시간에 시작됐다.
전날 오랜 운전으로 피로했던 한 친구가 아침 7시 출근인데 6시 50분에 눈을 번쩍 떴고 (다행히 빈야드가 집 앞이지만) 서둘러 오느라 점심식사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괜찮아, 어차피 두 시간 반만 더 일하면 집에 가는데 뭐-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우리는 하나같이 가져온 몫을 조금씩 나눠주려고 했다. 후식으로 가져온 사과 하나, 바나나 하나, 손 큰 친구들이 대짜로 만들어 온 까르보나라 등등.. 다 합치면 한 명이 점심식사할 정도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친구는 처음에 손사래를 쳤다.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인가를 사양하다가 우리도 지치지 않고 계속 권유하자 너무 고맙다며 음식을 나눠먹기로 했다.
너희 나라에서는 음식을 권유받았을 때 사양하는 게 예의야?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로 다른 문화권에 대한 관심들이 폭발했다. 같은 문화권 내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일이지만 대체로 유럽/남미 문화권에서는 뭔가를 권유받았을 때 자신의 선택에 따라 Yes/No 대답을 하고 스스로 조절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호스트가 음식을 더 권했을 경우, 자신이 먹고 싶으면 Yes 그리고 실례가 될 수 있으니 너무 많이 남기지 않도록 양을 적당히 조절한다는 것이다.
나만 혼자 아시안이라, 아시아 문화권에 대한 질문은 죄다 나에게로 넘어왔다. 잘은 모르지만, 중국 문화권에서는 저녁 식사에 초대됐을 때 음식을 싹싹 다 먹으면 주인이 ‘내가 너무 적게 준비했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실례라는 걸 들은 적이 있어서 그렇다더라-로 시작하며 한국인은 어떤가 가만히 생각을 먼저 해 봐야 했다.
우리 문화는 한 식탁을 공유하는 특성상 내가 혼자 다 먹고 싶더라도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되어 있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나는 뭔가를 더 먹겠냐고 권유를 받아도, 약간 불편한 자리에서라면 사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잠깐 생각이 다른 곳으로도 흘렀는데, 어린 시절 친척들이 용돈을 주셨을 때 우리 남매가 신이 나 넙죽넙죽 받는 걸 보고 부모님이 민망했던지, 다음에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고 말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제껏 개인의 욕구보다 예의가 중요한 문화권에서 자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대체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두세 번 먼저 No라고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근데, 어차피 한 두세 번 더 권유하면 마지못해 Yes 하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왜 그런 시간과 수고를 들여서 두세 번 묻고 사양하는 걸 반복해? 우리나라(아르헨티나)랑 한국 워킹홀리데이 체결됐다길래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난 거기 가면 예의가 너무 없는 사람 되겠다.
끝까지 사양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마지못해 Yes로 끝이 나기도 한다. ‘예의상’ 권하는 사람도 있고, ‘예의상’ 거절하는 사람도 있고. 그 ‘예의도 없이’ 혼자만 얌체같이 누리는 사람, 그 ‘예의도 없이’ 거절 한번 안 하고 계속 받아처먹기만하는 사람도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나도 대체 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우리는 서로 간의 예의를 중요하게 여겨서 그래,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 예의를 너무 중요시하는 것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대화였다. No라고 먼저 말하도록 배워서 의사표현을 어정쩡하게 하게 된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니 근데 뭐, 더 주시면 먹고요, 그렇게 계속 권하시면 어쩔 수 없이 받고요…’ 등등. 내가 뭘 원하는지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여서 들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무조건 사양을 먼저 하게 되니 내 관심과 취향이 흐릿해지는 게 아닐까?
‘취향’이 뭘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일까, 음식은? 색깔은? 향기는?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는? 카페에 가면 어떤 음료를 제일 많이 시키나? 누군가 뭘 먹자고 했을 때 그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무거나’를 제일 많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뭘 하자! 먹자!라고 제안을 하기보다는 취향이 뚜렷해서 의견을 먼저 내놓는 친구들을 그냥 따라가는 편이었다. 근데 그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답안지란다. 나는 제일 쉬울 줄 알고 내놓은 대답이었는데.
몇 년 간 취향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연습을 했고,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그런 것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는 분명하게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먼저 생각해보고 조율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원하는 게 있을 경우 먼저 사양하기보다는, 예의도 어느 정도 지키고 내 욕구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화의 방식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더 이상 '아무거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