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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Feb 27. 2021

꼭 그렇게 리액션에 집착해야 해?

방청객 역할은 그만 해야겠어요


TV 프로그램을 잘 안 보게 된 지 몇 년 됐다. 예전엔 그냥 한없이 깔깔거리고 웃기만 했던 많은 것들이 불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시청을 그만뒀다. 유튜브나 소셜미디어의 영상 첨부 기능을 이용해 짧은 클립들이 인터넷에 수두룩하게 돌아다니니 가끔 심심할 때는 재생 버튼을 눌러보기도 하지만, 내가 불편해했던 지점을 또 만나고는 플레이어를 닫는 패턴이 반복된다. 



... 저렇게까지 웃기다고?



요즘 불편한 점 중 하나는 '리액션'이다. 


유명 진행자들의 인터뷰 반응이나 연예인 다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이 하는 리액션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과도할 때가 있다. 웃다가 바닥에 구르거나 눈물을 훔치거나.. 전후 맥락이 숭덩숭덩 잘려나간 영상을 보게 되니 '내가 못 본 뭔가가 있나 보다, 저 사람은 정말 웃음이 많은가 보다'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뭔가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가끔 내향적 성향의 연예인들도 인터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면 과하게 리액션을 해야 해서 힘들 때가 많다고. TV 프로그램 출연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고 대중이 주는 인기를 먹으며 사는 연예인들은 한 컷이라도 더 방송에 나와야 하니까 일부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방송은 특정한 리액션을 계속 유도하기도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TV를 틀면 방청객 소리가 항상 들렸다. 화면에서 재밌는 장면이 나오면 하하하 웃는 소리를 깔았고, 조금 슬프거나 아쉬운 장면엔 어어↘︎ 하는 소리 등등 시청자들로 하여금 '느껴야 하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과도한 자막이 역할을 하고 있는 같다.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 말자막 역할뿐만 아니라 감정을 강요하는 자막이 수도 없다. 아이들의 옹알이나 동물들의 울음소리에도 자막이 붙어 있으니, 내가 화면을 보고 소리를 듣고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막의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자막 효과는 유튜브를 포함한 1인 미디어에도 속절없이 퍼졌다. 방송사나 프로덕션의 콘텐츠는 제작환경비슷하기 때문에 그렇다 치지만, 개인 채널 편집자들도 편집에 자막까지 넣느라 밤새우기 일쑤다. 자막이 없는 영상이나 외국 유튜브를 접하면 순간 '이렇게 대충 만들어도 경쟁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화면을 꽉꽉 채우는 자막이 없다면, 강제로 주입되는 감정과 리액션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미디어가 대중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미디어에 새로운 매체들까지 와글바글한 현재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인기 배우가 드라마에서 입은 옷들은 아무리 비싸도 순식간에 완판 행렬을 이루고, 유명 프로그램 촬영지는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새벽부터 인산인해다. 소셜 미디어에서 입소문을 타고 히트를 치면 주류로 입성하는 건 금방인 데다,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유행어가 만들어지면 카톡 창부터 시작해서 진지한 사회면 기사 제목에도 실릴 수 있다. 리액션도 유행어처럼 TV에서 현실세계로 그 단어와 모습이 넘어온 것 같다. 그런데 TV 브라운관을 넘어서 현실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 실체와 가치가 흐릿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컷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서 감정의 폭을 과도하게 넓힌 리액션이 현실에서도 당연해진다. 






그래서 리액션이란 게 뭔데? 뜻으로만 보자면 어떠한 자극에 대한 반응(Re - Action) 이므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반사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무언가를 칭하는 말이다. 대화에서 리액션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당신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있다'는 비언어적 전달이 되겠다. 그런데 그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리액션이라는 말을 누군가 TV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것을 억지로 확대하는 반응으로 변질된 것 같다. 특히 별로 웃기지 않은 말에도 깔깔 잘 웃는 사람이나, 한 문장마다 감탄사를 들려주는 사람에게 '리액션 좋네~'라는 반응이 자주 돌아온다. 특히 우리 문화에서는 위계상 하위에 있거나, 완곡어법을 더 많이 쓰는 여성인 경우 과도한 리액션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러한 리액션이 필요할 때도 있다. 1:1이나 소수 그룹 안에서는 이렇게 리액션이 좋은 사람들도, 단체가 되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무리 앞에서 '질문 있는 사람? 이해됐나요?' 등의 질문을 던져도 대답하는 이 없다. 누군가 해 주겠지. '대답 좀 해라?' 하면 그제야 산발적으로 힘 빠진 '네~'가 돌아온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중요 프레젠테이션 당일, 앞에서 긴장 반 열정 반으로 발표하는 사람에게는 듣는 사람들의 이렇다 할 호응이 없으면 그저 빈 사무실에서 허공에 대고 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무대 위의 한 사람이 떠들고 나머지는 듣는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고학년이 되어 새내기들을 데리고 오리엔테이션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처음 만난 동기들 선배들끼리 어색한 분위기를 깨부수고 준비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진행을 맡았던 한 선배는 마치 건배사를 외치듯 '불꽃같은!'이라는 말에 '리액션!'이라는 환호가 나오도록 이끌기도 했다. 단체 생활에서는 리액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균형이 너무 맞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작은 끄덕임이나 미소도 충분히 전달이 될 수 있다. 일정 정도의 리액션을 해주면 관객의 이해도를 파악하기 쉽고 결과적으로 소통 자체가 수월해진다.


가끔은 가짜 리액션도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해서 호감으로 받아들이고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스꽝스러운 고백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잊을만하면 보도되는 정치인/정재계 관계자들의 성인지 감수성 부족 뉴스들처럼 '웃어주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줄로 오해했다'는 변명으로 사회면을 장식하게 될 때도 있다. 억지로 하는 건 티가 나기 마련인데, 리액션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런 위계질서 아래편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 일상이 되어 아주 연기자가 되어버린 경우일 수도 있다. 리액션이 습관이 되어 가짜 친절함이 된 것이다. 






나 또한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친구들, 지나가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 리액션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아 진짜요? 그렇구나, 우와, 아~, 하하하 웃어주는 등 조잡하고 의미 없는 언어를 쉴 새 없이 입 밖으로 내놓았다. 속으론 진짜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하거나,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로봇처럼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억지로 몇 시간 동안 붙잡혀 이야기를 들어준 일이 셀 수 없이 많고, 호감으로 오해받은 적도 적지 않다. 어느 날 혼자만 웃는 농담, 자기 자랑으로 시작해 남들은 관심도 없는 본인 얘기만 하는 사람에게 리액션을 해 주다가 멍하니 눈앞의 대화를 바라봤다. 피자 도우를 살살 달래듯 펴지 못해서 뻥뻥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저 구멍으로 단어와 문장이 다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불현듯 떠올렸다. 흥미 없는 소재나 별로 신기하지 않은 이야기까지도 억지로 내 감정을 속여가며 상대방을 위해 크게 반응해 줄 필요는 없어. 이런 사소한 거짓은 대화에도 구멍을 내고 나에게도 구멍을 낸다. 그 사람이 나의 리액션에 실망했다면 그저 그 대화에 공감할 다른 사람을 찾으면 그뿐이다. 나와는 다른 소재로 이야기하면 된다. 나누기 즐거운 이야기에는 자연스러운 웃음과 반짝거리는 눈빛이 따를 것이다. 아직까지 사회생활에 리액션이 아예 빠질 수는 없지만, 그저 상대방에게 무례하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고 나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면 된다. 진짜 Re-Action이 중요하다. 나는 억지로 공간의 소리를 채워 넣어야 하는 방청객이 아니다. 


이건 돌고 돌아 또 대화방식의 문제점이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상대방과 같이 공감하고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공간을 채우면 그뿐이다. 리액션은 결국 거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방청객 역할을 그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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