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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May 13. 2021

더 이상 내 인생에 졸라맨이란 없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을 보는 것도 중요해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작은 성취감을 반복적으로 얻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일단 몸을 움직여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하면서 '오늘 하루는 침대에서 나와, 뭔가 나 스스로 해내고야 말았다'는 마음을 조금씩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퇴근 후 정말 미치도록 귀찮아도 따뜻한 물 아래 비누로 구석구석 몸을 씻고 나서 좋아하는 향의 바디로션을 펴 바르고 있다 보면 조금이나마 다시 인생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고 했다. 바닥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부엌과 화장실의 찌든 때까지 말끔히 청소하고 나면 그렇게 보람찬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는 사람도 있다. 


"선생님, 근데 저는 무기력하고 우울하지만 하루에 두 번씩 씻고 집안도 항상 잘 정돈해요. 그래서 이런 사소한 걸로는 성취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요. '꼭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의무감 때문에 하는 거라서요. 그렇다고 또 널브러져 있는 걸 보자니 더 짜증이 나고요."


어떤 사람은 책임감이 너무 없어서 주변에 폐를 끼치는데, 나는 그치들이 깎아먹은 평균치를 올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나 스스로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내팽개쳐뒀을 때의 불안감이 상충하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이런 집안일은 둘째 치더라도, 저는 제가 하는 모든 활동들을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요." 글쓰기, 책 읽기, 영화 보기, 영어 공부, 필사 등등 매일 조금씩 하는 활동들. 남들에게는 여가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즐거워서 시작한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강박적으로 하게 되니, 잘하고자 하는 마음에 온전히 즐기질 못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어떤 일이건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가다 보면 그것이 쌓여서 내게 안도감과 성취감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지간한 작은 걸로는 성취감을 느끼기가 어렵고,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자니 중간에 멈추게 될 게 뻔했다. 새로우면서 흥미로운 데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15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 본다. 나는 친구들 전부 뺑뺑이 돌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실업계로 진학한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부모님이 원하니까 대학교는 가야겠는데 남들처럼 0교시부터 야자까지 하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다양한 활동을 해본 후 특별전형을 적극 이용해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디자인과 영상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픽 디자인과가 있는 학교로 진학했는데, 아주 큰 문제와 맞닥뜨렸다. 그 옛날 장미 가족 덕분에 혼자 포토샵을 익혀서 디지털 툴에는 너무나 익숙한데.. 그림을 못 그리는 게 문제였다. 생전 관심이 없었다. 그 흔한 교과서 낙서라고 해 봐야 고작 삐딱하게 고개를 틀고 졸면서 끄적거린 허물어지는 도형 몇 개가 다였고, 그림보다는 글자를 활용해서 낙서를 하곤 했다. 그러니 소묘 시간에는 항상 애를 먹을 수밖에. 빛이 잘 들어오는 옥탑 교실에서 모두가 이젤 앞에 앉아 4B연필과 떡 지우개를 들고 원통이나 사과를 그리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여기가 제일 밝은 부분이고, 여기가 제일 어둡고.. 하면서 수정을 해 주셨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여기가 어떻게 제일 밝은 부분이에요? 어두운 부분 바로 옆에 있는데? 나만 그 빛을 못 보는 것 같았다. 디자인 전공인데, 수행평가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는 게 다름 아닌 소묘를 포함한 미술 관련 수업이었다. 자조하며 그래 이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이제 내신 공부에 집중해 대학을 가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생각했다.


'난 그림 못 그려' 하고 나니, '그림 못 그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졸업 작품도 그림이라고는 없이 컴퓨터 타이포그래피를 기반으로 한 포스터 작품을 냈다. 대학교에 간 이후에도 포토샵 일러스트로 홍보물을 만들고, 손으로 쓰는 대자보도 뚝딱뚝딱 글자를 채워 나갔는데 여백을 채워줄 그림을 그려야 할 때면 작아졌다. 뭔가를 그림으로 설명할 때도 졸라맨을 그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말한 그대로 이뤄진다고, 나는 그림 못 그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그것 때문에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다고 한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라는 일 자체가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내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정확히 기술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쌓이는 직업이기도 하고, 이 한 몸 벌어 먹일 능력이 있으니 지금보다는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꿈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지던 때는 훨씬 지났다. 어차피 이젠 디자이너 될 일도 없으니, 그림을 못 그리는 것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다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못해도 되잖아?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 101에서 디지털 드로잉 강의 카테고리를 둘러보다가 아름다운 썸네일을 발견했다. 제목도 심지어 <영화 같은 일러스트 그리기>.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강의들이 많은데, 내게 익숙한 포토샵으로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커리큘럼도 적당해 보였고 차근차근 따라 하다 보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존에서 초심자에게 적당한 타블렛을 골라 주문하고, 강의 신청을 했다. 


한 강의당 평균 8~12분이라, 하루 분량의 성취감을 채우기에는 최고였다. 강의를 들으면 소분류 강의명 옆에 체크무늬가 뜬다. 챕터별로 미션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연속 수강하면 포인트도 적립해주니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건 사과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소묘처럼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는 것이 아니라, 큰 특징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그려나가는 것이 강의의 핵심이었다. 이제는 기억도 아득한 디자인 이론 수업에서 들었던 대비와 유사 등을 다시 떠올리며, 하나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영화 같은>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 이론이나 프레임 구성 요소를 배우기도 하니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을 적절하게 조합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예상한 대로 나는 계속 버벅거렸다. 타블렛이 손에 익지 않아 뱀처럼 기어가는 선을 그리기도 하고, 간단해 보이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거북목을 하고 그림을 그리자 노트북이 과열돼 나 죽는다고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시간이 흐르는 걸 모를 정도로 몰두한다는 점이었다. 매일 10분 강의를 보고 따라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는 이것 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온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뭔가를 할 때 성인 ADHD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지고 잡생각이 많이 나던 몇 년을 보냈는데, 이런 힐링의 시간이 찾아오다니!


뒤로 갈수록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강의 시간이 길어지고 설명이 복잡해지자 '잠깐, 내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너무 힘들었는데, 이걸 그리다 보면 또 잠을 못 자고 말 거야. 그렇게 강의는 일상 때문에 뒤로 밀려나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계속 페이지에 접속하는 미련을 보였다. "아, 주말에라도 그려야 하는데.." 또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시작된 것이다. 수강 기간이 끝나버리면 배우지도 못하고 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까 봐, 게으름 피우다 돈 아깝게 수강 기회를 놓치고 말까 봐..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다시 그렸다. 한 작품을 만드는 4~50분짜리 강의는 10분어치씩 잘라서 듣고, 10분어치씩 잘라서 그렸다. 빨리 할 필요도 없고, 잘할 필요도 없다. 내 페이스를 찾으며 적당한 선에서 그만하는 법을 배웠다. 이게 만약 클라이언트 의뢰 일러스트였다면 나는 1픽셀씩 조정하며 또 며칠씩 고민해가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대충 해도.. 되긴 되네?라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조금씩 다시 폴더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오늘, 몇 번의 수강 연장을 끝내고 드디어 100% 완강 미션을 달성했다. 등록한 지 6개월이 지났으니 원래 예정되었던 3개월에서 2배의 시간이 걸린 거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내가 끝냈다는 게 중요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래.. 빨리 하고 끝내버리자.'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끝내고 나니 큰 감동이 찾아왔다. 사과에 비치는 빛도 못 봐서 '대체 이게 뭐야..' 했던 그 옛날의 나는 더 이상 없다. 선생님처럼 잘 그리지는 못해도, 내가 선택한 색이 별로여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포토샵이 아니라서 이런저런 기능을 새로 찾아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집중하는 내가 됐다. 귀찮더라도 일단 시작해서 타블렛을 연결하고 그리다 보면, 또 마음이 나고 욕심이 생긴다. 그러다가 막혀서 중간에 그만할까 하는 나약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보고 나니 드디어 '내가 끝냈구나! 이제 스스로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겠구나!' 싶다. 내가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고, 매일 출석 체크 포인트도 받고, 미션 완료 포인트도 받고..  꼭 '해야 해서'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내가 이걸로 밥 벌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못하면 어때. 그냥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하루의 1시간이 아주 소중했다.






모바일 앱에서는 완강! 이렇게 뜨던데 웹에서는 100% 수강 중...


뭔가를 끝내고 나니까 또 힘이 생긴다. 사실 브런치 글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작가의 서랍만 계속 채워나가고,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행을 안 한지 또 몇 달이다. 클래스 완강으로 성취감을 달성하고 나니 그럼 이거에 대한 글이라도 써볼까? 하고 시작한 게 바로 이 글이다. 아침에 초고만 써 놓고 또 수정을 미루고 미뤘지만.. '해야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이 나서 했다는 게 중요하다. 모든 건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끝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한번 끝을 보고 나면 스스로에게 주는 피드백으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니 일단 귀찮더라도 시작하는 것과,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끝을 보는 것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오늘은 정말 '뭐라도 한 날'이 아니라 '뭔가를 해낸 날'이니까.. 내게 보상을 줘야겠다. 떡볶이 해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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