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하나 없는 깨끗한 동화마을 라스토케
자그레브 공항을 출발한 지 약 1시간 40분가량이 흘렀다.
출발 당시에 내비게이션에 'Rastoke'를 입력해도 나오지 않아서 사실 좀 당황을 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그 동화처럼 예쁘다는 마을의 이름이 '라스토케'라는 정보 이외에는 내 머릿속에 저장된 그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난 숙박을 할 것도 아니었고, 흔히들 여행에서 말하는 맛집을 갈 것도 아니었고, 그냥 단순히 그 마을을 다녀온 다른 여행자들이 찍어온 몇 장의 사진 그리고 '꽃보다 누나'에서 잠깐 나왔던 화면으로 인하여 그래, 저기는 꼭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
어쩌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을 하고 또 해보았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내가 만들어 온 나만의 여행 일정표 속에 바로 그 정답이 있었다. "라스토케는 분명 플리트비체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니까, 이 마을 구경을 마치고 플리트비체의 숙소로 이동하면 되겠다"라고 여행 계획을 짜면서 내가 무심결에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Plitvice(플리트비체)'로 내비게이션에 입력을 하고 길을 나섰었다.
그런데 정말 내비게이션에 플리트비체가 약 30km 남짓 남았을 무렵... 거짓말처럼 동화 같은 마을이 눈앞에 들어왔다. 분명 난 크로아티아도 처음이거니와, 라스토케 역시도 처음 와보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느낌이 왔다. 아, 바로 여기는구나!
그렇게 처음 마주하는 크로아티아 여행의 첫 목적지인 라스토케의 모습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나는 서둘러 주차장에 차를 대고서 카메라를 들고 내려 미친 듯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 순간 나는 흥분했었다. 컴퓨터 모니터로만 봐오던 그 동화마을에, 상상만 했던 그 아름다운 마을에 지금 내 두 발이 서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긴, 17시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땅 위에 있던 내가 지구 반 바퀴를 날아 유럽 대륙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아직은 얼떨떨하긴 하니까.
딱 한 달만 머물다 가고 싶다
라스토케는 슬루니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슬룬치차(Slunjcica) 강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내려온 코라나(Korana)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작고 예쁜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서는 굳이 여행 가이드북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난 잡동사니가 가득 든 가방과 여행책을 과감하게 차 안에 모두 두고서, 달랑 카메라 하나만 어깨에 둘러매고 라스토케를 걷기 시작한다. 라스토케는 정말 작은 마을이지만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 한 채 한채, 유유히 흐르는 강 그리고 목조 다리까지 볼거리는 마을의 크기와는 상반되게 전혀 적지 않았다.
라스토케 마을은 물 위에 집이 지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신기한 이 광경이 가능한 것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바닥이 석회화되어 단단하게 굳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을 끼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의 하부로 물이 흘러 들어가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아주 독특하고도 신비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펼쳐지는 매력적인 마을. 이러니 잠시도 눈을 뗼 수가 없을 수밖에. 라스토케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미니어처'라고도 불린다는데 진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는 듯한 조용하고 한적한 동화마을 라스토케. 진짜 이런 마을에 딱 한 달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없이 했다. 이럴 땐 내 마음대로 일정을 조절할 수 있는 장기 배낭여행객들이 정말이지 부럽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도시를 만나면 3일이건 일주일이건 내 마음이 내키는 만큼 머물다갈 수 있는 그럴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여행을 사실해본 적이 없다. 늘 회사에서 받아낼 수 있는 휴가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많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까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여행을 해왔고, 앞으로도 뭐 평범한 직업으로 살다 보면 계속 그런 여행일 수밖에 없겠지.
이 마을에 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빠져들듯 라스토케를 거닌다.
그렇게 발길 닿는 대로 목적지나 지도 따위는 접어두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한참을 걷다 보니 이 동화 같은 라스토케 마을에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매표소가 나온다. 『슬로빈 유니크 라스토케(Slovin Unique Rastoke)』라고 불리는 유료 관광존이었다. 이곳에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면 물레방아와 함께 라스토케의 전통가옥을 볼 수 있으며, 식당과 민박집도 함께 운영되고 있어 하루 머물다 갈 수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입장 요금은 어른 기준으로 25쿠나니까 한국돈으로는 약 4,500원(2016년 4월 당시 환율)이다. 하지만, 만약 이 유료 관광존 내에 있는 민박집을 예약하였다면 입장료는 무료라고 한다. 숙박객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으니 그리 인심이 야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슬로빈 유니크 라스토케는 일요일은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니, 뭔가 신비할 것만 같은 이곳이 보고 싶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 꼭 방문해야 한다.
난 이 유료 관광존에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이미 예약이 되어있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내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고,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 아무리 예쁜 풍경이지만 기운이 없어서 이왕 돈을 지불하고 무엇인가를 얻는다면 관광보단 식사를 택해야겠다는 본능이 솟구쳤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일단 식사부터 해서 고픈 배를 달랜후에 유료 관광존까지 천천히 구경을 하고 플리트비체로 넘어가거나 뭐 오늘 그냥 여기서 하루 머물러도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하니, 현재의 난 관광이냐 식사냐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음에 이렇게 또 한 번 아쉬움을 조용히 내뱉는다.
하지만 금세 난 굳이 유료 관광존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라스토케는 충분히 아름다운 마을이었으니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해, 충분해 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이 또한 나에게 주어진 여행이니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렇게 난 여행을 하면 할수록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도 배꼽시계는 정확하다.
하긴 먹은 거라곤 17시간의 비행 동안 우리에게 제공된 3번의 기내식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입에 잘 맞지 않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한 데다가, 자그레브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입에 넣기는커녕 렌터카를 받아 여기까지 열심히 달려왔으니 배가 고플 때도 되었지.
라스토케 마을을 걷다가 레스토랑의 이름인 듯 보이는 큰 글씨로 써진 'PETRO(페트로)'라는 글자 아래로 귀여운 생선 한 마리가 접시 위에 놓인 그림과 함께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면 전방 몇 km에 휴게소가 있다는 안내판처럼 포크와 나이프 모양의 그림, 커피잔 그림, 음료 그림 등이 그려진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이렇게 그림으로 표현해둔 것이 어쩐지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이곳에서 내 주린 배를 채우리라 결심을 하고 찾아가 본다. 나중에 찾아보았더니 우리가 갔던 이 레스토랑이 바로 라스토케 27번지에 위치한 여행객들에게도 현지인들에게도 송어구이로 유명한 맛집이었던 것.
흔들의자가 있고 미니 사이즈의 폭포까지 감상할 수 있는 너무나 예쁘게 꾸며진 모습에 여기가 내가 찾아온 식당이 맞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게다가 오후 4시라는 점심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와서 그런 건지 이 넓은 레스토랑에 손님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원래 처음 가는 식당 앞에서 내부를 살펴본 후 음식을 드시고 계신 손님들로 북적거리면 나도 자신 있게 들어가는데, 그렇지 않으면 괜스레 '이 식당 맛이 없나...'라며 쭈뼛쭈뼛 거리는 게 한국사람들의 특징이다. 나 역시 피는 못 속이고 레스토랑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환하게 웃는 얼굴로 "Welcome"이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주시는 점원분. 의심했던 나의 마음이 미안해질 만큼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해주시며 지금 이 레스토랑엔 우리들밖에 없으니 원하는 자리를 마음껏 골라 앉아도 좋다고 말씀해주신다.
360도 파노라마처럼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착석하자마자 곧바로 내게 주어진 메뉴판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나무로 된 식탁에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메뉴판이라니 정말이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이곳으로 날 이끌었던 귀여운 안내표지판부터 환한 미소가 예쁜 점원 분과 환상적인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레스토랑의 인테리어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크로아티아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식사로 'PETRO(페트로)'를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송어 구이 1kg과 맥주도 한 병 주문하였다.
주문을 완료하고서, 아무도 없는 식당을 천천히 둘러보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오염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 것만 같은 라스토케의 그림 같은 하늘과 사방이 푸릇푸릇하고 폭포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고 벚꽃잎이 어마어마하게 떨어지는 너무나 낭만적인 이 분위기가 여기가 크로아티아라는 것이 어쩐지 실감이 잘 나질 않는다. 어릴 때부터 보았던 동화책 속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한참을 넋을 잃고 풍경에 심취해 있는데 먹음직스럽게 생긴 식전 빵을 가져다주신다. 작년 신혼여행으로 갔던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그랬듯이, 유럽에서는 우리가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식당에서 내어주는 식전 빵을 먹으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사실 작년에는 유럽이 처음이었던지라 당연히 공짜인 줄 알고 열심히 먹었는데, 나중에 계산서에 우리가 주문하지 않은 내용이 적혀있길래 물어보았더니 '식전 빵'이라고 쿨하게 알려주셨더랬다.
그러니 유럽의 레스토랑을 이용할 때에는 식전 빵이 먹고 싶지 않다면 처음부터 당당하게 "NO"라고 말하고 받지 않거나 이미 식탁 위에 올려져 있다면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표시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거나, 냅킨 따위를 올려두면 된다. 그리고 반드시 계산서에 식전 빵이 포함되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것.
배가 고파서 식전 빵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빵이 매우 짜다.
이렇게 짤 줄 알았다면 돈도 내야 하는데 아예 손대지 말 걸 그랬다며 3초 만에 후회가 밀려드는 찰나, 내 눈앞에 가뭄의 단비 같은 맥주가 등장했다. 그는 바로 크로아티아 대표 레몬맥주인 '오주스코(Ozujsko)'.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접선하는 오쥬스코는 정말이지 리얼하게 상큼하고 방금 막 레몬을 짜 넣고는 약간의 알코올과 탄산을 첨가한 '술맛이 약간 나는 레모네이드'라고 표현하면 될까.
하지만 술맛은 정말 정말 약하다. 레몬주스에 더 가까울 정도의 느낌이라 열심히 라벨을 훑어보니 역시나 알코올 함량이 2%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역시 그랬던 거였어! 라스토케에서 처음으로 마셔본 이 오쥬스코를 시작으로 11박 13일 동안 내와 내 여행 동반자가 함께 마신 레몬 맥주는 대략 매일매일 하루 한 병은 넘게 마셨으니 30병은 되지 않을까.
상큼한 레몬맥주에 푹 빠져 열심히 마시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송어구이 등장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두 마리의 송어와 함께 노오란 무엇인가가 함께 나왔다. 언뜻 봤을 땐 감자인가? 했었는데 먹어보니 옥수수로 만든 옥수수빵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 먹었을 땐 이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지, 어떤 맛이라 해야 하지, 맛 자체가 없는 무(無) 맛이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점점 먹을수록 중독된다고 해야 할까. 옥수수의 작은 알갱이가 씹히는 느낌으로 그럭저럭 꽤 괜찮았다. 역시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원래 육류만큼이나 생선도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송어구이는 참으로 맛있었다. 라스토케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답게 생선요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비린맛이 없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하지만 갓 지어진 뜨끈뜨끈한 새하얀 쌀밥에 김치가 함께 있었더라면 열 배는 더 맛있었을 것 같다는 웃습게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식사였다. 역시,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크로아티아에서도 나는 느꼈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서를 받고 나서야 송어구이의 진실을 알았다.
어쩐지 송어가 달랑 두 마리 나오길래 "이게 1kg이야? 너무 양 적다"라고 말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두 사람이라 알아서 양을 줄여 600g으로 주셨던 것이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나쁜 상술에 익숙한 나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그리고 알아서 배려해주는 크로아티아인들의 마음씨에 이렇게 또 감동을 받는다. 사실 1kg을 다 주셨어도 워낙 대식가인 우리 부부는 다 먹었을 테지만, 여자 두 명에서 온 손님들 혹은 아이를 동반한 여행객 등 양이 적은 손님들에게는 더없이 좋을 듯. 송어구이의 가격이 1kg에 180쿠나(약 32,000원)였는데, 그리하여 우리는 총 156쿠나(약 27,000원)만 지불하고서 페트로를 나섰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마을에서 동화 같은 식사를 마친 나는 동심으로 돌아간 어린아이마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