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에 갑자기 나타났다. 스마트폰을 보며 걷던 사람들은 한동안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 저게 뭐예요?”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게 된 건 한 아이의 물음 덕분이었다. 이내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에 떠 있는 그 물체를 주목했다. 그것은 전광판처럼 생겼다. 붉은빛으로 알 수 없는 기호가 희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출근길의 사람들은 한 번 하늘을 쳐다본 후,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고 발길을 재촉했다.
“영화 촬영 중인가?”
누군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하나둘씩 흥미를 보였다. 어떻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 수 없는 전광판과 그 알 수 없는 기호들. 사람들은 이것이 아마도 어느 회사의 퍼포먼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곧 상용화된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자동차가 날아다닌다면, 하늘 신호등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농담 섞인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전광판은 여전히 희미한 붉은빛으로 기호를 점멸시켰지만,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이 지나자, 전광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잠깐의 화젯거리일 뿐이었다. 뉴스에서도 이 현상을 별다른 주제로 삼지 않았고, SNS에는 몇몇 사람들이 올린 짧은 영상들만이 남았다. 그건, 그저 가벼운 이슈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주일 후, 다른 도시에서 같은 전광판이 목격되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빨간빛이 더 짙어졌고, 전광판에 새겨진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전보다 선명해졌다. 무엇보다도, 이번엔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사진과 영상을 찍었지만 이번에도 아무 회사나 언론도 이 현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SNS에는 전광판의 정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이것이 일종의 퍼포먼스일 거라며 넘겼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번엔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같은 전광판이 목격되었다는 게시글들이 SNS에 넘쳐났다. 사람들은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알 수 없는 전광판이 여러 나라의 하늘에 동시에 나타났고, 그 붉은빛은 점점 더 짙어져 갔으며, 기호는 더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교 분석을 시작했다. 2주 전, 1주 전, 그리고 오늘의 전광판을 비교하면서 깨달았다. 전광판의 문자가 매번 미세하게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이 아니었다. 전광판이 보일 때마다 사람들은 촬영을 멈추지 않았고, 커뮤니티는 이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웠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이번 전광판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에 남아 있었고, 매일 아침마다 글자가 조금씩 바뀌었다.
과학자들은 분석하기 시작했으며 언론은 이 현상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외계 생명체의 신호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매일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불안을 느꼈다. 그 붉은빛은 마치 그들을 위협하는 듯했다.
몇 주가 흐른 뒤, 언어학자들과 암호학자들이 그 전광판에 적힌 문자가 지구의 문자로 변환될 수 있음을 밝혀냈다. 미세하게 변한 문자는 숫자였다. 그 숫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숫자는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광판의 숫자는 어느덧 마지막 숫자인 “1”로 줄어들었다. 전 세계의 모든 화면에서 그 숫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각국의 과학자들은 전광판의 메시지를 해독하였다. 하지만 전광판은 일방향 소통만 한 것인지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시간이 끝나기 전에 답을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정확히 자정이 되었을 때, 모든 전광판에서 붉은 글자가 사라졌다. 하늘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고, 마치 세상이 숨을 멈춘 듯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거대한 섬광과 함께 빛났다. 전 세계의 하늘에 떠 있던 전광판들이 하나로 연결된 듯 거대한 외계 함선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지구 생명체가 상상할 수 있는 기술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 장면을 목격했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끝이 다가왔다는 절망감이 사람들을 휘감았다. 상상 속에서 존재했던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침범하러 왔다는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
그러나 외계 생명체는 지구를 즉시 파괴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언어로 된 메시지가 전광판을 통해 인류에게 전해졌다. 곧바로 각국의 최고 언어학자들이 모였고, 암호 해독 작업에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숫자는 이미 사라졌지만, 새로운 문장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어 점차 명확해졌다.
“지구 대여 기간 만료. 연장 가능 여부 검토 중.”
이 문장이 해독되자 사람들은 그 의미를 두고 혼란에 빠졌다. ‘대여’.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지구는 외계 생명체의 소유였고 인류는 지구의 세입자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대여’라는 말에 좌절했으나 연장이라는 말에 환호했다. 대여 기간의 종료가 인류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이라는 가능성을 남긴 것이다. 외계인들은 인류를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연장 조건: 인류의 자격 증명.”
정부와 각계의 전문가들은 급히 회의를 열었고, 외계인들이 원하는 ‘자격’이 무엇인지 추측했다. 지구에서의 자원 관리, 평화 유지, 혹은 생명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시험일 수 있었다. 외계인들은 오랜 시간 인류를 관찰하며 그들의 행동을 기록했을 것이다. 전광판에 뜨던 그 숫자는 단순한 카운트다운이 아니었다. 외계인들은 그 기간 동안 인류를 관찰하고 시험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지구 자격을 평가하고 있었고, 이제 마지막 평가를 통해 지구의 운명이 결정될 참이었다.
외계 생명체가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그들이 직접 지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대한 함선에서 수백 개의 작은 비행체를 보냈고, 이들은 전 세계의 주요 도시와 기지를 순식간에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엇을 보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목적은 분명했다.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외계 생명체는 인류에게 남은 시간 동안 지구를 구하기 위한 선택을 할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행성을 지키는 방법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환경을 복구하고,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을 열어가야 했다.
마지막 결정은 외계 생명체의 지도자가 직접 내렸다.
“지구 대여 연장: 100년.”
인류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마지막으로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지구의 임대 기간을 연장해 주었지만, 조건은 분명했다. 인류는 100년 안에 지구에서 자원과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에 따라 외계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인류는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외계 생명체의 관찰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100년 뒤 다시 돌아와, 그때도 인류가 지구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