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나 안에 있고, 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브라만, 양자역학, 범재신

by 지안

들어가는 말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바닷가에 서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볼 때,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숨을 고를 때, 깊은 숲 속의 바람 소리에 온몸이 잠길 때. 그 순간, 나와 세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나는 여기 있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 속에 있다”는 이상한 평화가 밀려온다.


그건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연결감’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경이로움’이라고 한다. 중요한 건 그때 우리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와 나무, 바람, 바다, 별이 한 호흡처럼 이어져 있다는 묘한 확신.


요가는 이 감각을 우연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인간 의식이 잠시 본래의 자리를 기억하는 순간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나’라는 작은 이름을 넘어, 모든 것과 닿아 있는 더 큰 존재로 확장된다. 요가 철학은 이 근원적인 ‘하나’를 브라만(Brahman)이라 부른다.





요가 철학에서의 브라만

: 모든 것의 근원


브라만(Brahman)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팽창하다, 확장되다”에서 비롯된다. 이 ‘팽창’은 단순히 크기가 커지는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경계 없이 퍼져나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근원적 성질을 뜻한다. 브라만은 형상 이전의 실재, 모든 만물과 현상이 나타나기 전의 ‘존재 자체’이며, 시간과 공간, 생멸의 한계를 넘어선 절대 원리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는 브라만을 변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의 토대이자 궁극의 실제로 묘사한다. 이는 서구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창조주와는 다르다. 브라만은 의지를 가진 개별 존재라기보다, 바다처럼 무한하고, 공기처럼 어디에나 스며 있는 ‘존재성 자체’에 가깝다.


요가 철학에서 브라만은 단순한 신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동시에 그 안에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절대 의식’이다. 베다 경전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브라만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이 브라만 안에 있다.”


자칫 추상적인 종교 문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요가에서의 브라만은 훨씬 실질적이다. 형체가 없고, 색깔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지만, 우리가 숨 쉬고, 걸으며, 사랑하고, 웃는 그 모든 순간의 바탕이 된다.


브라만을 이해하려면 먼저 ‘나’에 대한 통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보통 ‘나’를 한 개별적 인격체, 즉 이름·성격·경험·기억의 총합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요가는 말한다. “그것은 너의 가장 얕은 층일 뿐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나를 이루는 몸과 마음, 생각과 감정 모두가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도일 뿐이며, 그 파도들이 출렁이는 바다 자체가 바로 브라만이다.


이때 중요한 건, 브라만이 ‘나 밖에 있는’ 거대한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트만(Ātman), 즉 ‘참된 자아’와 브라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트만은 브라만이다”라는 우파니샤드의 선언은, 우리가 찾고 있는 우주의 근원과 진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뜻이다. 바깥에서 뭔가를 새로 붙잡아야만 완전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미 그 하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 ‘참된 자아’, 즉 몸과 감정, 생각, 역할 등 변화하는 조건을 넘어서는 순수한 본질이다. 우리는 흔히 ‘나’를 외형과 경험으로 정의하지만, 아트만은 그 모든 것을 관찰하는 의식이며, 바꾸거나 손댈 수 없는 깊은 중심이다. 깨달음이란 이 아트만이 사실상 브라만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와 우주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개별성은 단지 파도가 바다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형상에 불과하다. 바가바드 기타 13장 31절은 이렇게 말한다.


“아트만이 브라만과 하나임을 아는 자는,

설령 몸이 사라져도 멸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이 오면 ‘나’와 ‘타인’, ‘나’와 ‘세계’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래서 브라만을 이해한 이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실존적 자각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환경으로 가득하다. 직업, 소득, 성취, 관계에서의 역할이 나를 정의하는 유일한 기준처럼 여겨지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작은 틀 안에 가둔다. 인도 철학에서 이를 ‘아비드야(avidyā, 무지)’라 부른다. 무지는 단순히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참된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요가의 수련은 이 무지를 걷어내고, 나와 세계가 본래 하나였음을 기억하게 한다.


바가바드 기타 5장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브라만을 바라보듯,

학식 있는 브라만, 소, 코끼리, 개,

개를 먹는 사람, 모두를 동일하게 본다.”


이는 모든 존재를 물리적으로 똑같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모두 동일한 빛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 통찰이 깊어질수록 경쟁과 비교의 강박은 힘을 잃고, 우리는 더 부드럽고 자비로운 태도로 세계를 대하게 된다.


브라만은 결코 먼 곳에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숨 쉬고 있는 공기 속에도, 나를 지탱하는 땅 속에도, 사람과 마주한 눈빛 속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지하는 연습이다. 차를 마시며 그 따뜻함이 온몸에 퍼지는 순간, 나무에 핀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의 이야기에 깊이 귀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브라만의 흐름 속에 있다. 다만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그 연결을 잊고 있을 뿐이다.


브라만은 또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준다. 그것은 ‘개별성’을 넘어선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만의 색깔, 성취,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애쓴다. 물론 그 동기는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지만, 거기에만 갇히면 끝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불안을 키운다. 브라만의 관점은 다르다. 이미 모든 것이 하나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애써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바다는 스스로를 바다라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출렁일 뿐이다. 우리도 그렇다.


그래서 브라만의 가르침은 화려한 초월이 아니라, 더 깊은 귀환이다. “너는 이미 그 안에 있다. 이미 하나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잊었기에 분리감을 느끼고, 그 분리감을 채우려 애쓴다. 요가의 수련은 바로 그 기억을 되찾는 길이다. 아사나로 몸을 정화하고, 프라나야마로 호흡을 고르게 하며, 명상으로 마음의 파동을 잦아들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고요 속에서 나와 모든 것이 하나였음을 다시 보기 위해서다. 그 순간, 나와 너, 여기와 저기,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사라지고,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충분하고 온전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양자역학의 비분리성

: 과학이 말하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분리’라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상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 나와 세상을 분명히 구분한다. 책상 위의 컵과 그 옆에 놓인 책은 서로 다른 물건이고, 나와 당신은 별개의 존재이며, 지구와 달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존재한다. 고전 물리학은 이 직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한쪽의 변화는 다른 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은 이런 전제를 뿌리째 흔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양자 얽힘’이다. 이는 두 개 이상의 입자가 서로 강하게 연관되어, 물리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시스템처럼 행동하는 현상이다. 한 입자의 상태를 측정하면, 다른 입자의 상태가 즉시 결정된다. 이 거리가 수 미터든, 수천 킬로미터든, 심지어 은하의 양 끝처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멀더라도 그 연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놀라운 점은, 이 정보의 전달이 우리가 아는 ‘빛의 속도’라는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마치 공간과 거리를 초월하는 보이지 않는 통로가 있는 것처럼, 변화가 즉시 공유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현상을 두고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고 표현하며 의문을 품었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여러 차례의 실험이 그 실재를 입증했다. 특히 1980년대 알랭 아스페와 동료들의 실험은, 얽힌 입자들이 거리와 무관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 이후 이 개념은 단순히 물리학의 호기심거리를 넘어, 양자 암호나 양자 컴퓨팅처럼 실용적인 기술의 토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더 이상 시적 은유나 영적 상징에 머물지 않고, 물리학의 실험실에서 매일같이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이 ‘얽힘’의 의미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뀐다. 우리는 흔히 존재를 독립된 개체들의 모음으로 본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모든 존재가 깊은 차원에서 서로 얽혀 있으며, 개별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실체는 없다고 말한다. 내 몸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는 수십억 년 전 별의 중심에서 형성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몸과 지구, 태양, 심지어 먼 우주의 사건들이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주의 일부’인 동시에 ‘우주 전체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브라만의 사상과 양자역학이 맞닿는다. 브라만은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는 근원적 실재이며, “모든 것은 브라만 안에 있고, 브라만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선언은, 양자 얽힘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연결성’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고대 인도의 현자들은 명상과 직관을 통해 이 일체감을 체득했고, 현대의 과학자들은 실험과 수학적 언어로 이를 탐구하고 있다. 방법은 다르지만, 두 길 모두 같은 방향. 모든 것이 본래 하나라는 진실을 가리킨다.


물론 브라만과 양자장의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브라만은 형이상학적·영적 차원의 ‘존재성 전체’를 가리키고, 양자장은 물리학적 세계의 ‘에너지-물질의 장’을 설명한다. 그러나 두 관점은 분리와 개별성이라는 환상을 넘어,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전체라는 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개별적인 정체성도 새로운 빛으로 보인다. 나는 내 몸과 생각을 가진 ‘나’이지만, 동시에 무수한 존재와 사건의 총합이기도 하다. 내 호흡은 나무가 내뿜은 산소와 이어져 있고, 내 몸의 원자는 오래전 다른 생명체의 일부였으며,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과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양자 얽힘이 입자 사이의 연결성을 말하듯, 브라만의 통찰은 존재 전체의 얽힘을 말한다.


우리가 이 연결성을 실감하기 시작하면, 삶의 태도도 달라진다. 경쟁과 소유, 경계와 구분이 절대적인 가치로 보이지 않게 된다. 대신,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지탱한다는 감각이 깊어진다. 누군가를 해치는 일은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이라는 직관이 생기고, 나를 돌보는 일이 곧 세상을 돌보는 일이 된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비분리성은, 단순히 과학의 언어로만 이해할 때는 차갑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브라만의 사상과 나란히 두면, 그것은 훨씬 따뜻하고 살아 있는 메시지가 된다. 그건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이자, “너는 이미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위로다. 과학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요가는 그 사실을 체험하게 한다.





범재신 사상

: 신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은 신 안에

범재신 사상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곧 신이다”라는 뜻이다. 이 사상은 단순히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 세계와 존재를 바라보는 철학적·형이상학적 관점의 전환을 뜻한다. 서양 철학사에서 이 개념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인물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였다. 그는 당시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전통적인 종교관 즉, 신은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창조하고, 때때로 개입하며, 인간의 기도를 듣고 보상하거나 벌을 내리는 인격적 존재라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스피노자는 신을 초월적 통치자가 아니라,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단순히 우리가 보는 숲, 강, 하늘, 동물 같은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다. 그건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모두 포함하는,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절대적 실재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표현이며, 신으로부터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바람이 부는 것, 별이 도는 것, 인간이 생각하는 것, 꽃이 피는 것처럼 모든 현상이 바로 신의 무한한 속성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은 우주의 바깥에서 세계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곧 세계 그 자체이며,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다.


이 관점은 동양의 브라만 사상과 놀라울 만큼 깊게 맞닿아 있다. 브라만 역시 특정한 장소나 시공간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모든 것에 스며 있는 절대적 원리다. 다만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언어의 차이로 인해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서양의 범재신 사상은 주로 합리주의와 철학적 논증의 틀 속에서 발전했고, 동양의 브라만 사상은 오랜 명상과 내면의 체험 속에서 깊어졌다. 하지만 본질적인 메시지는 동일하다. “네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곧 신이다. 그리고 너 자신도 그 일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범재신 사상과 브라만 사상이 모두 ‘신’을 외부에서 따로 찾아야 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신은 어떤 특별한 장소, 예를 들어 성당, 사원, 성지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신성은 이미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과, 지금 마시는 물,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눈빛 속에도 있다. 신은 특정한 종교의 경계나 의식에 갇혀 있지 않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렇게 보면, 범재신 사상은 단순히 종교적 교리를 바꾸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신’을 세계와 분리된 주체로 보던 시각에서, 세계 전체를 신성한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단지 철학적 사유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가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마저도 우주적 전체성의 일부이며, 신성의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범재신적 관점에 서면, 세상은 더 이상 ‘정복해야 할 대상’이나 ‘분석하고 소유할 대상’이 아니다. 산은 그저 광물의 집합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신성한 현현이고, 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우주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이때 신성은 성당이나 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의 나무와 사람들의 얼굴, 심지어 내가 매일 드나드는 부엌과 책상 위에도 있다. 범재신 사상은 이렇게 일상을 ‘신성의 장’으로 변환시킨다.


현대 사회에서 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지나치게 분리된 정체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 인간과 자연, 마음과 몸, 성공과 실패 같은 이분법은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경쟁·소외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본래 하나라는 감각을 되찾으면, 경쟁보다는 공존이, 소유보다는 나눔이, 지배보다는 연결이 자연스러운 선택이 된다.


요가 수련에서의 브라만 체험도, 범재신 사상에서 말하는 ‘모든 것의 신성함’도 결국 같은 결론으로 향한다. 그것은 외부에 있는 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속해 있는 전체성을 깊이 자각하는 일이다. 의식이 확장될수록, 우리는 더 이상 ‘신에게 다가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신 안에, 신과 함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요가·과학·철학이 만나는 지점

: 너와 나의 경계는 물결의 선과 같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고립된 개체,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브라만, 양자 얽힘, 범재신 사상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결코 떨어져 있지 않으며, 모두 하나의 거대한 흐름과 구조 속에서 이어져 있다. 이 메시지는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 너머에 놓인 깊은 연결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의 숨결과 다른 이의 숨결, 나의 삶과 별빛의 역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촘촘히 얽혀 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원자는 오래전 초신성의 폭발 속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별의 재로부터 태어났고, 죽으면 다시 별로 돌아간다.”


이 말은 시적이면서도,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당신이 마시는 공기 속의 산소, 피 속의 철, 뼈를 이루는 칼슘이 모든 원소는 먼 과거, 별의 심장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몸이 흙과 공기와 바다로 흩어질 때, 그 원자들은 다시 새로운 생명과 별의 일부가 될 것이다. 과학이 말하는 이 우주의 순환은, 브라만이 전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메시지와 겹친다.


이 일체감을 깊이 자각할 때, 우리는 외로움과 경쟁심, 분리감의 사슬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나와 타인을 가르는 경계가 흐려지고, 세상과 맞서는 마음 대신 세상과 함께 흐르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서 오는 평화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타인을 억누르며 앞서가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요가는 이렇게 말한다.


“너와 나의 경계는 물결의 선과 같다.

물결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바다는 하나다.”


브라만의 깨달음은 세상을 떠나 은둔하는 고립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모든 존재를 나처럼 아끼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내가 숨 쉬는 공기, 발 딛는 땅, 마주한 사람 모두가 나의 일부임을 알기에, 해치려 할 수 없고, 무심할 수 없다. 그 사랑은 감상적인 연민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당연함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별빛이 먼 우주에서 나를 비추고, 내가 내쉬는 숨이 언젠가 또 다른 생명의 일부가 될 것을 알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거대한 전체 속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파동이 된다. 요가의 길은 바로 그 파동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나로 받아들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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