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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Aug 07. 2019

단어1,Bruchstücken im Gedächtnis

여행하는 말들



      내가 요리를 할 동안 당신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줘,라고 말해요. 그 요청은 가벼워 보이지만 강력한 주문이에요. 잠들어 있던 기억의 서랍을 열게 할 뿐만 아니라 어느 강렬한 인상들과 다시 마주하게 하고, 그 여리기만 했던 꼬마를, 몇십 년이 흐른 지금의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어요. 

사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해요. 왜 하필 그 순간이었는가. 망각의 위협에도 끝내 살아남은 기억은 왜 하필 두려움과 슬픔으로 압도되었던 순간인가. 부서진 조각들이 모여 어린 시절의 전체적인 상像이 되고, 그 기억은 생의 알리바이가 되어버리죠.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에게 물어요.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가. 한 장의 사진을 보듯 제삼자 입장에서 '어린 나'의 이미지를 묘사한다면 본인의 기억일지라도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요.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고 고통을 잘 견디지 못해서 속고 속이는 프로세스에 무척 능해요. 오래된 기억이 다른 기억보다 손상되고 각색될 확률이 더 높은 건 어쩌면 당연한 거죠. '당시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라고 질문을 달리 해보면 어떤가요. 그러니까 어떤 유사한 행위나 사건의 공통점을 찾기에 앞서, 그로부터 발생한 '감정의 경험'을 추적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에요. 기억에 감정이 개입되는 건 필연적이니까요.


"1952년 일본에서 출간된 쇼헤이 오오카의 <불>이란 책에서 나는 이런 글귀를 읽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ㅡ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중에서 



 

     누군가에게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수시로 작아지고 맙니다. 마치 짓지 않은 죄를 고백하는 기분이지요. 아이들은 무력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다 판단하거나 지적할 능력도, 상황을 변화시킬 힘도 없어요. 그저 협소한 세계의 주인인 부모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되죠. 원하든 원치 않든.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부끄러움>의 첫 문장입니다. 그녀는 열두 살에 경험한 아버지의 끔찍한 폭력 사건을 잊지 못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공포는 트라우마가 되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인생을 은밀하게 지배하고 조종하는 어둠의 근원이 되죠. 그녀는 말해요. 누군가에게 이 기억을 고백하는 순간, 친밀하다고 믿었던 관계마저도 겁먹은 눈을 하고서 하나둘씩 떠나갔다고. 그러한 위험 부담을 알면서도 아니 에르노는 왜 자신의 기억을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 걸까요. 

상처를 공유하는 행위로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치유하거나 타인의 이해를 구걸하려고 한 것은 아닐 거예요. 단지 그녀에게 어린 시절의 공유란, 일종의 자아 분석의 가능성에 가까웠을지도 모르지요. 낙인 같은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의 주제로 내던지는 것으로 사건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서려고 한 거죠. 그녀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어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신조를 견지하면서 언제나 회의적이고 냉엄한 분석가적 태도를 취하는데, 알다시피 쉽지 않은 일이죠. 글쓰기 도중에도 수시로 들이닥치는 욕망, 작가를 괴롭히는 변형과 미화의 충동과 투쟁하고, 글쓰기로써 자신의 삶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자기 연민도, 의미부여도 존재하지 않아요.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는 타인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동시에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에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감당할 수 없다면서 떠나버리지만, 실은 그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향한 본인 믿음의 문제에 가까워요. 그 트라우마가 언제든 자신을 겨누는 화살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상대도 결국에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불신이죠. 그렇다고 해서 사랑한다면 반드시 고통을 나누어라,라고 말하지 않아요. 단지 그 무력한 시간을 지나 여러 극복의 과정 이후 내가 존중하는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고마워하며,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당신의 시간여행에 동행하겠다는 즐거운 의지를 보일 뿐이지요. 사랑은 행동해야 하니까요.


      그래요, 당근과 감자를 썰면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비등점에 도달한 냄비에서 기분 좋은 연기가 나기 시작해요. 당신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어떤 학생이었는지 말하다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어린 시절에 떠났던 여행에 대해 묘사하다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무늬를 남겼는가 조심스러운 암시를 남기죠. 라디오 듣듯 가만히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요. 요리가 완성되어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낯설고도 익숙한 꼬마 아이가 내 눈앞에 있겠죠. 나는 아무것도 나무라지 않고, 겁먹거나 겁 주거나, 그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당신의 시절을 안아주리라 다짐합니다. 당신의 유일함 앞에서 용기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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