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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Aug 07. 2019

단어2, sich verirren

여행하는 말들


      지름길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1년을 오갔던 곳인데 왜 이제야 이 길을 발견했을까요.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직접 걸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낯선 길을 걷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할 수 있으니까요. 헤매다가 목적지와 더 멀어진다든지, 마주치기 싫은 사람들을 만난다든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든지, 이 길이라고 확신했지만 막다른 길에 도달한다면? 그래요, 전 미리 겁을 먹은 겁니다.


      태생적으로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이 있지요. 스페인의 중세도시 톨레도를 여행할 때 동행자였던 친구는 골목길을 몇 번 오간 것으로 이미 모든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세상 모든 정보가 적힌 지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하게 걷더군요. 톨레도의 골목은 저에게 무한히 반복되는 미로처럼 여겨질 뿐이어서 새삼 친구의 능력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물론 중세의 시간을 품은 이 아름다운 도시가 미로처럼 '같음의 반복'일 리는 없습니다. 비좁은 골목들이 만드는 그늘과 빛의 음영, 연한 갈색빛의 바래진 건물들, 발코니에 내놓은 색색의 화분들, 고립되어 있지 않은 수도원, 평온한 요새 같은 엘 그레코의 집... 산타크루즈 미술관의 어떤 곳은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하고 소리가 났는데, 엘 그레코 특유의 어둠의 색채에 홀린 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듯 아주 천천히 발을 뗐다 내려놨다 했던 게 떠오릅니다. 목적을 잃으면 쉽게 길을 잃지요. 그리고 미혹 앞에서 우리는 자주 목적을 잃습니다.




Sich in einer Stadt nicht zurechtfinden heißt nicht viel.In einer Stadt sich aber zu verirren, wie man in einem Walde sich verirrt, bracht Schulung.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찾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발터 벤야민은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과 숲에서 길을 잃는 것을 분리하고 '헤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태나 결과가 아닌 일종의 가치로 여긴 듯합니다. 이 '헤맴'의 공간은 책이나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의 공간이거나 개인의 내면 공간 혹은 신비주의적 공간일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도시'와 '숲'은 무엇이 다른가요. 숲은 앞서 말한 미로처럼 공간의 실체를 분별하기 힘듭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걸어야만 합니다. 더군다나 숲만큼 감각적으로 우리를 포획하는 공간성은 유일할 정도여서 사람들은 그곳에 빠져 버렸다 혹은 갇혀 있다는 식의 불안에 압도될 확률이 큽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불확실한 공간에 몸을 내던지듯 길을 잃어야만 할까요. 그 행위가 도시 가게들의 간판을 구별하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셈하며 걷는 길보다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길'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Der Weg'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방법', '수단', 혹은 '생애'로 비유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인생에 관하여 이 닳고 닳은 비유를 떠올리는 것보다 '숲'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편이 좋은 듯합니다. 길은 언제나 도달이라는 목적을 가지지만, 길의 끝인 죽음을 목적의 달성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지요. 그에 반해 숲은 무한한 발견의 공간이며 얼마큼 왔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며칠 전부터 새로운 지름길로 걷고 있습니다. 여전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나를 덮칠까 두렵지만 이 길이 익숙해질 때까지 걸어보려고 합니다. 당신은 오늘도 어제처럼 부단히 당신만의 길을 걷고 있을 테지요. 그때 우리가 만났던 새로운 길을 당신이 오랫동안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들,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던 작은 것들도요. 그것들이 분명 내일의 길에 도움이 되리라 믿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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