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내가 오랫동안 따르고 존경하고 있는 스승은 코헬렛을 좋아했다. 그는 코헬렛의 저자를 솔로몬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이름 없는 저자'라고 칭했는데, 그의 자전을 쓰고 싶다고 할 정도로 23세기 전에 쓰인 이 짧은 텍스트에 담긴 삶의 통찰과 사고의 결론에 매료된 상태였다. 실제로 코헬렛은 성경의 다른 텍스트와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 허무주의적이며 과격한 논리, 예컨대 무신론적인 텍스트의 성향으로 오랫동안 유대 랍비들 사이에서 논란과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없었더라면 정경에 포함되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통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권선징악, 인과응보와 같은 것을 일체 말하지 않고 허무주의적 태도, 모든 것은 헛되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지상에서 지혜로운 자는 오히려 근심이 많고 악한 자가 판을 치는 부조리한 세상이며 모든 것은 때가 있으므로(Alles hat seine Zeit) 지나가면 무릇 소용이 없다는 구절로 '바로 지금, 현재'를 숙고하게 한다. 텍스트의 결론은 다름 아닌 '즐겨라'이다.
젊은이여, 젊을 때에, 젊은 날을 즐겨라.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라라. 다만, 네가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라. So freue dich, Jünglig, in deiner Jugend und lass dein Herz guter Dinge sein in deinen jungen Tagen. Tu, was dein Herz gelüstet und deinen Augen gefällt; aber wisse, dass dich Gutt um das alles vor Gericht ziehen wird Kohelet 11:9
스승은 코헬렛의 저자는 무신론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코헬렛에 등장하는 신은 스피노자의 은유적 신(자연법칙의 총체를 철학적 개념으로 '신'이라 명명)과 다름없는 추상적인 실체로서 신, 팔레스타인에서 광범위하게 말해지던 신격 보통명사 신(el)이며, 허무주의적 주장을 펼치면서도 꾸준히 상기시키는 '신'의 존재는 실제로 냉혹한 세계의 섭리를 경고하는 일종의 상징적 의미라는 것이다.
텍스트 마지막에 덧붙인 '"하나님의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와 같은 문장은 원문에 덧붙여진 어느 랍비의 경고이며, 실제로 저자는 어떤 장에서도 이러한 경고를 하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 목사님은 코헬렛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설교를 이어나갔다. "전도자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는 야고보서 4장 14절에서 말하듯 인간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즉 한낱 피조물이기에 늘 겸손하며 생명에 대한 경이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안고 살아가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기독교의 일직선론처럼 지상의 삶은 천상에서 계속 이어질까, 영원회귀 사상처럼 모든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한히 반복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것은 단 한 번 뿐이며 우리는 그저 부조리한 세상에 원인과 이유 없이 내던져진 것일 뿐일까? 어떤 세계를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만으로 '모든 것은 헛되다'와 같은 귀결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와 같은 해석이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 해석의 교합점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두 해석은 모두 인간 생명의 연약함과 그 유한에 대해, 아슬아슬하게 행불행을 가르는 중앙선을 밟으며 걷고 있는 낙엽 같은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자명하다. 어느 순간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태도인 것도 그 이유다. 세상을 경험하며 생을 이어나가는 인간이라면 세계가 공평하게 운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조리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개인이 추구하는 수많은 가치를 헛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즐겨라'라는 명령은, '어떻게'가 자주 생략된다는 함정을 가진다. 코헬렛의 저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주장과 '즐겨라'라는 귀결을 뒷받침하기 위해, 즐거움, 슬기와 어리석음, 억압, 수고, 우정, 승진, 부와 같은 세목들을 거론하며 그마다 몇 가지 논리와 근거를 세우는 것처럼, 삶은 단 한 문장을 진리로 삼기엔 수많은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기에 그만큼 와전의 위험성도 크다. 그러면서 저자는 "죽은 사자보다는 살아있는 개가 낫다"라고 말하며 주어진 '몫'을 선용하며 사랑과 포도주를 즐기며 열정과 절제의 기쁨을 알라고 말한다. 지금 발을 내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때인지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 순간'을 아는 것.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찾기 위해 살아간다. 순간의 힘을 믿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찰나가 모여 자신을 형성하는 일종의 '근간'으로 변화하는 것을 시시때때로 감지하고, 본인으로서 증명하게 된다. 지혜와 기쁨, 부와 명예가 실제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도 그것이 삶의 의미가 아닌지 두리번거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한다. 그러니까 비록 모든 것이 부질없더라도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존재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한평생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창조주가 하느님이라는 결정적인 원리를 믿기 이전에, 내 마음을 두드린 것은 '절대 선'이라는 빛의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선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행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로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들을 위하고 환대하는 선의 행위는 종교가 있든 없든 (어렵더라도) 개인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은 상징적인 행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과정 안에 있다는 걸 배웠기에 내 안에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무너뜨려야 하는지 신앙 안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아마도 내 삶의 의미는 이 같은 고민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그게 코헬렛의 저자의 말처럼 부질없는 것일지라도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의 방향성은 찾은 것 같아 기쁘다. 한없이 인간적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