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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Aug 11. 2019

조해진 <단순한 진심>, 진심이라는 말

독서노트 / 짧은 단상



이 소설에는 존재를 둘러싼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하나, 명명의 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존재가 완성되는 것과 같이 이름에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둘, 모든 개인은 세계의 작은 조각이자 저마다의 우주이므로 모든 생명은 귀하다.

그리고 셋, '진심'이라는 단어


오래전 여름, 서른 한 살의 앙리와 서른 세 살의 리사는 빛으로 일렁이는 세계 속에 있었다. 도로의 신호등이나 경고등마저 그들을 위해 빛을 발하는 듯 보였고,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원뿔 모양의 햇빛은 그들의 사랑을 호위하는 자연의 조명 같았다. 그들은 그해 초봄, 생미셸 거리에 있는 서점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 서점 지하철에서는 앙리가 카메라 스태프로 참여한 독립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중학교 수학 교사였던 리사는 그 영화를 보러 온 열한 명의 관객들 중 한 명이었다. 리사와 함께 니스로 여행을 갔다가 오래전 영화 공동체의 멤버였던 동료와 재회하기 전까지, 앙리는 그 빛의 세계가 곧 사랑의 영역이라고 믿었다.

....

천천히 돌아선 리사는 앙리에게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처음으로 밝혔다. 리사가 불임이란 걸 이미 알고 있던 앙리는 그런 리사를 고요히 건너다볼 수밖에 없었다. 빛이 사윈 자리엔 어둠이 빠른 속도로 스며들고 있었으나 어둠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의 영역이 진심에 근접하다는 걸, 리사의 눈물을 보며 앙리는 깨달았다. 그날 밤 그들은 두 가지를 결정했다. 입양과 입양할 아이의 이름, 나나. 나나는 그들이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던 날, 파리 외곽의 오래되고 허름한 극장에서 함께 본 고다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단순한 진심> 110-111p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이 문장을 받아 적었을 때 왜인지 '진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 문장이 낯설게 여겨졌다. 혹시 '진실'이라는 단어를 잘못 본 건가 싶어 집중해 다시 문장을 살펴봤다. '진심에 근접하다'

<단순한 진심>이라고 불리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저의, 진심입니다.'

      도대체 진심이란 무엇일까.

누군가 묻는다. "네 진심은 뭔데?" 도무지 대답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기억들, 상상과 작위로 이루어진 부정적 감정, 그럼에도 갈망하고 희구하는 본연의 그리움, 셀 수 없이 많은 감정이 혼재되어 있어서 결코 분류되지 않는, 감정되지 않는 마음……. 실제로 진심을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속내마저도 오해하고 합리화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이 단어 자체를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진심을 위해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 과정은, 증명이 아닌 선언을 위한 과정이다.  


'그게 내 진심이다'

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것은 진심이 된다.

진심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를 흔드는 소용돌이의 감정이 아니다.

누가 뭐라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결코 변하지 않을 마음의 자세가 된다.



2.

      "이 세상 모든 생명에 바치는 저의 헌사"라고 소설가는 썼다.

      생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울컥할 때가 있다. 언젠가는 뜬금없이 독일어 사전에 가만히 생명, 이라는 단어를 쳐보기도 했다. Leben, 이 희소성 없는 단어로는 생명(生命)이라는 한자어가 주는 고귀한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날 생 목숨 명. 태어나 목숨을 부지하는 기간. 그러나 우리는 '생명'과 '삶'을 분리해서 사용한다. 생명이라는 단어에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함, 신비로운 기적의 서사가 숨어 있다. 


지난 생일에 편지 도착했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살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했어"

살라는 명령, 나는 이 문장을 다시 곱씹어 본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작든 크든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의미가 있다고. 그러니까 의미를 찾을 때까지 살아야만 한다고. 사는 게 고통스럽고 아프더라도 다시금 일어서야 한다고. 어떤 생명이 피나는 무릎을 꼭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다면 또 다른 생명은 기적처럼 그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갈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고.



작년 6월 파리의 산책로를 걸으면서 나는 사실 우주를 낳을지, 아니면 포기할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때 나는 똑같은 확률로 각각 선택을 가정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어떤 선택이든 이기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주를 포기하는 것보다 우주를 담보로 외로움과 불안을 감면받고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마음에 대해 말하는 미래의 어느 날들이 오히려 더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우주가 실패를 반복하며 좌절에 익숙해지고, 급기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텅 빈 사람으로 성장할까 봐 겁이 나기도 했지요. 세상을 자신의 감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 구조 안에서 더 갖고 덜 누리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없고 타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구경꾼처럼 방관하는 살아 있는 유령 같은 어른이라면, 나는 그런 우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따로 있었습니다. 우주가 나를 닮는 것, 나의 가장 외롭고 나약한 모습을 닮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헛되게 살다가 고독 속에서 죽는 것보다 태어나지 않은 채 소멸하는 쪽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무책임하게 생명을 낳고 버린 뒤 잊는 사람을 온 힘을 다해 미워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그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낳기로 했습니다.

내가 증거니까요.

태어나고 구조되고 보호받고 누군가의 딸이 되고 배우와 극작가로 일하고 있으며 이제는 우주와 가족이 된, 그야말로 살아 있는 삶의 증거니까요. 태어나기 전에 포기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던 시절과 지금도 가끔씩 그런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재의 나 자신마저 포함하는 내 삶이니까요.

엄마, 들리나요?

나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엄마가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한때는 엄마의 전부였겠죠.

그것을 기억해주세요...

엄마, 하고 부르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은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요.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부탁입니다.

엄마의 평안을 빕니다.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저의, 진심입니다.

                                                                                                               조해진, <단순한 진심> _마지막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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