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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May 27. 2019

화요일의 도토리묵무침

할머니의 도토리묵

할머니의 도토리묵

나의 시골, 그러니까 아빠의 고향은 충청남도 천안이다.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는 지내지 않았지만 큰집이어서 명절에는 꽤 많은 손님이 방문했다. 제사가 없어도 손님맞이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최소 3가지의 국, 5-6가지의 나물 요리, 6-7가지의 전 요리, 만두, LA갈비, 갈비찜, 불고기, 3-4가지의 김치, 잡채, 각종 구이용 생선 등등등등등

대부분의 음식은 며느리들이 각자 집에서 재료를 준비해 와서 다 같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냈다.

며느리 넷이 있어도 할머니만 준비할 수 있는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떡, 식혜, 도토리묵이었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만 준비할 수 있었던 그 세 가지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할머니는 설날 떡국을 위해 직접 지으신 쌀을 가지고 동네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 가래떡을 뽑아오셨다. 1-2일 정도 말린 떡을 써는 날에는 할아버지가 마당에 앉아 할머니를 위해 칼을 갈아주셨다. 할아버지가 갈아준 칼을 가지고 한석봉 어머니처럼 하나하나 직접 썰어서 준비하셨다.

그리고 명절을 앞두고 가족들이 도착하면 할머니는 방앗간에 한 번 더 가셨다.  가족들 먹일 인절미, 시루떡 등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셨고, 떡을 좋아하지 않는 큰손녀가 유일하게 먹는 절편과 방금 뽑아낸 가래떡도 따로 싸오셨다.

할머니가 떡집에서 돌아오시면 할아버지는 뒷산에서 채취한 꿀을 덜어 상위에 올려놓으시고는 나를 찾아 옆에 앉히셨다. 사촌동생들이 호시탐탐 떡을 노렸지만 꿀을 듬뿍 찍은 절편과 가래떡은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나만 맛볼 수 있었다.


할머니가 만든 식혜는 한겨울 설날에도 아직 더위가 채 물러가지 않은 추석에도 맞춤 음료였다. 밥알을 후후 불어내고 마시는 그 맛. 엄마는 너무 달다고 식혜를 많이 먹지 못하게 했다. 그런 엄마 눈을 피해 밥을 다 먹고 ‘할머니!’하고 부르기만 해도 벌써 컵에 따라둔 식혜를 몰래 건네주셨다. 그리고 내가 집에 돌아갈 때에는 생수병에 식혜를 담아 꽁꽁 싸매서 내 배낭에 넣어주셨다. 가는 길에 차에서 꺼내 먹으라고 말이다.


명절날 할머니 집 베란다에 놓여있는 커다란 대야에 들어있던 탱글탱글한 도토리묵. 직접 주우신 도토리를 갈아서 만든 도토리묵은 쌉싸름하면서도 고소했다.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

기름진 명절 음식을 먹다가 맛보는 묵요리는 상큼하고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예쁘게 편으로 썰어두신 묵은 언제나 내 젓가락질을 테스트했다. 결국 접시 위에 조각조각이 나버린 묵을 할아버지가 집어 숟가락 위에 얹어주시면 양념장을 올려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손님들이 다녀가고 연휴 마지막 날에 할머니가 말아주시는 묵밥은 따뜻하게 먹는 설날에도 시원하게 먹는 추석에도 후루룩 후루룩 잘도 넘어가는 요리였다.

조금 더 꾸덕하게 마른 묵의 윗면만 따로 썰어서 만든 무침은 쫄깃쫄깃 새콤달콤 밥도 필요 없었다.

그렇게 다양하게 묵을 즐기다 보면 커다란 대야에 들어있던 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할머니가 도토리묵을 쑤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언제나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면포에 덮인 대야만 보였다. 커다란 대야에 들어있던 도토리묵은 세월이 지나며 점점 작은 그릇에 담겼고, 나도 편으로 썰린 묵쯤은 한 번에 젓가락으로 집어낼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지금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할머니에게 묵요리법과 식혜 만드는 법, 충청도 나물 퍼레이드 레시피를 전수받을 수 있었을 텐데.




지난주 '수미네 반찬'에서 도토리묵밥을 했다. 도토리묵이야말로 충청도의 특산품 아니던가. 다른 어떤 메뉴보다 할머니가 떠오르는 방송이었다. 충청도가 고향이고 충청도에서 평생을 사셨던 우리 할머니의 도토리묵.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남편이 묵밥을 해달라고 한다.

시장에 간 김에 묵을 한모에 1,000원, 오이 하나 500원에 사 왔다. 만들어둔 육수가 없어 묵밥은 다음으로 미루고 도토리묵무침을 해보기로 한다.


모양 칼로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묵, 오이, 양파, 텃밭 상추를 준비한다. 대부분의 레시피에서는 쑥갓 넣는 것을 추천하는데 할머니는 구하기 쉬운 상추를 넣어서 무쳐주셨다.


간장, 식초, 고춧가루, 설탕, 마늘, 깨, 참기름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준다.

준비한 재료와 양념장을 넓은 그릇에 넣고 살살 섞어주면 끝.




시장에서 사 온 묵이라 할머니가 해주셨던 것처럼 꼬들꼬들 하지도 도토리묵 특유의 쌉싸름함도 덜하다.

그래도 이 한 접시로 할머니를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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