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2015년
2014년 2월 6일, 드디어 전역을 했다.
예정대로라면 바로 대학교 복학 준비를 해야 될 2월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학교로 돌아가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내게 맞는 길을 찾을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맞지 않는 전공을 다시 공부할 자신도 없었고 도저히 전공대로 취업을 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조심스레 휴학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정말 극심하게 반대하셨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남들처럼 공부하고 남들처럼 취업을 해서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길 바라셨는데 휴학을 하겠다고 하니 놀라신 듯했다. 그리고 1, 2학년 동안 내가 보여드렸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기 때문에 나에 대한 신뢰도 부족한 상태였을 것이다. 어쨌든 며칠 동안 휴학하겠다 vs 절대 안 된다 대치가 이어졌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다. 휴학 연장 신청을 하려면 적어도 2주 안에는 결론을 내야 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꿈 ppt라는 걸 준비해서 부모님 앞에서 발표를 했다.
- 군대에서 어떤 꿈을 찾게 됐는지
- 왜 지금 이 타이밍에 휴학을 해야 하는지
이 두 가지를 설명드리고 나름 특별조항도 하나 내걸었다.
"휴학을 허락해주시면 용돈 지원 없이 혼자 서울에서 살아남겠습니다!!"
결국 부모님은 백기를 들고 휴학을 허락하셨다.
그렇게 전역한 지 2주 만에 바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우선 지낼 집부터 구해야 했다. 월세가 저렴한 자취방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이대입구역 근처에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된 장위동에 집을 구했다. 오래된 다세대주택이어서 그런지 하루에 바퀴벌레가 10마리도 넘게 나오던 집이었다.
집은 구해졌고 이제 월세를 내려면 알바도 구해야 했다. 부모님의 지원을 하나도 받지 않기로 선언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알바를 가려가며 구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안 해본 알바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알바들을 했었다.
<해봤던 알바들>
키즈카페, 주유소, pc방, 자격증 시험 감독관, 컴퓨터 설치, 택배 배송 보조, 방송 조명팀 보조, 방청객, 물류창고 정리, 야간 공장, 고깃집 주방보조, 사무보조, 영어유치원 뮤지컬 촬영, 영화관
그리고 정말 부끄러운 흑역사지만 지인에게 소개받아서 한 화장품의 상세페이지에 들어가는 화장품 사용 모델도 했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돈벌이로 했던 것 중 가장 재밌었고 기억에 남는 건 친구들과 길거리 장사를 해봤던 경험이다. 방산시장에서 담요를 떼와서 한강에서 서울 세계 불꽃 축제할 때 팔았었는데 하루 만에 100만 원어치를 팔았었다. 담요 한 장에 1500원쯤에 떼와서 5천 원, 6천 원 정도에 팔았었으니 꽤 남는 장사였었다.
이렇게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알바를 계속하면서 내 꿈을 위한 여정도 계속해나갔다.
이때 군대에서 정했던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는 좋은 방향키가 되어주었다.
내가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목표는 확실했기 때문에 이 목표에 집중해서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나갔다. 그중 몇 개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1) 꿈틀이 청소년 진로 멘토링 및 강연회
군대에서 만들었던 꿈틀이 커뮤니티를 제대로 키워보고자 전역 후에 사업자등록을 했었고 본격적인 활동들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중고등학교, 청소년센터 등에서 청소년들에게 진로 관련 멘토링을 진행했었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토크콘서트를 열기도 했었다. 다양한 연사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토크콘서트는 특히 인기가 좋아서 여러 회차를 진행하기도 했다.
2) 국내 최초로 사람들의 꿈을 전시하는 꿈 전시회
멘토링과 강연회라는 포맷에서 벗어나서 색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고민하던 중 전시회를 떠올리게 되었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또래 청년들 12명을 섭외해서 그들의 꿈을 전시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일푼에 아이디어만 가지고 무작정 시작했고 먼저 전시회 기획과 운영을 도와줄 소중한 운영진들을 모았었다. 그 팀원들과 함께 전시회 개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서 5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한 달만에 모을 수 있었다.
꿈 전시회가 열리는 1주일 동안 관객 1000명이 다녀가셨고 후에 조선일보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어줄 정도로 나름의 성공을 거둔 프로젝트였다. 이런 객관적인 지표도 물론 기분 좋았지만 제일 기분 좋았던 순간은 꿈 전시회를 보러 온 한 학생이 작품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이런 전시회를 열어줘서 고맙다'라고 감사 표현을 하던 순간이었다.
3) 주름진 꿈을 피다 독립 단편 다큐멘터리 기획 및 제작
(다큐멘터리 영상 : https://youtu.be/A8cX-NOSsTE)
제일 소중하고 애정이 가는 프로젝트. 아직도 영상을 볼 때마다 코가 시큰해지는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노인 분들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친구 여섯이 모여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로 6개월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금의 노인 세대는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개인의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게 있었어도 접어둘 수밖에 없는 꿈들이 많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런 노인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청년 세대로써 마땅히 그분들께 보답하고 싶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에 세대 갈등이 극심했던 때라 꿈이라는 매개체로 세대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주름진 꿈을 피다'라는 프로젝트 이름에도 이런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자 많은 고민을 했었다.
*주름진
1) 노인의 주름을 표현
2) 못 다이루고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꿈의 모습
*피다
1) 꽃이 만개하듯 꿈이 피어나는 모습
2) 꿈이 적혀있던 종이를 꾸겨서 버렸지만 다시 펴는 모습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행했던 프로젝트인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운 좋게 신문, 방송, 라디오 등 여러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4) 츄러스 가게
츄러스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시는 한 대표님의 제안을 받아서 경희대 앞에서 운영 중인 츄러스 가게를 무상으로 인수받아 운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츄러스가게를 운영하면서 생기는 수익으로 학생들을 위한 여러 가지 복지사업을 진행할 계획을 갖고 거의 3개월 동안 본사를 왔다 갔다 하면서 교육을 받았었다. 부푼 꿈을 안고 인수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프랜차이즈 본사가 망해버렸다. 전국에 체인점이 80여 군데나 있는 곳이었는데 그렇게 한순간에 망해버릴 줄이야... 3개월 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 됐지만 츄러스 맛있게 만드는 방법 하나만큼은 터득할 수 있었다.
5) 카페 운영
츄러스 가게 운영계획이 어그러진 후 낙담해 있는 나에게 답십리 쪽에 있는 한 카페를 무상으로 임대받아서 운영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운영수익이 적자가 나던 카페였기 때문에 적자만 아니면 된다면서 임대료도 받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 제안 주신 분이 건물주였고 본인 건물에서 운영하는 카페였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처음 딱 카페를 이어받았을 땐 메뉴 개발도 하고 맥주도 들여와서 팔고 술안주도 만들어서 팔기도 했었다. 심지어 아침에는 일찍부터 준비해서 카페 앞 길거리로 나가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 샌드위치를 팔기도 했었다.
카페 운영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라 맨땅에 헤딩하듯이 이것저것 다 했었다. 그렇게 한 달을 운영했는데 매출이 오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권에 대한 이해, 고객 분석, 판매가 설정에 대한 노하우,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등에 대한 분석 하나도 없이 무식하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카페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겠다고 판단해서 한 달 만에 사업 아이템 변경을 시도했다. 낮에는 코워킹 스페이스, 밤에는 파티룸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최소비용을 들여서 인테리어도 직접 다시 했다.
2015년 당시 국내엔 코워킹 스페이스 개념이 없었을 때라 획기적인 운영방식이었는데 다행히 수요가 있어서 입주자들을 금세 모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낮 시간 동안 매출을 채웠고 밤 시간에는 파티룸으로도 꽤나 성공적으로 운영이 되었다. 운영한 지 3개월 만에 안정적으로 월 매출 5~600만 원 정도 나왔고 임대료가 없었기 때문에 매출이 곧 이익으로 잡혔었다.
문제는 운영한 지 6개월이 되던 때에 터졌다.
매출이 잘 나오고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걸 본 그 건물주가 이제는 자기가 직접 운영할 테니 나가라고 통보를 해왔다. 나가지 않을 거면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200만 원을 내라고 했다. 답십리라는 상권 시세 상 그 금액은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고 당장 그 큰돈을 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걸 남겨둔 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배운 교훈은 무슨 일이든 계약서부터 쓰고 해야 된다는 것과 세상에 영원한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만두고 3개월 후 결국 그 카페는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서 적자가 났고 얼마 후 망해서 사라졌다.
애정을 쏟아부어 운영하던 카페를 그만둔 후 앞으로 뭘 해야 될지 막막했다.
마침 부모님과 약속했던 휴학 기간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복학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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