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성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P의 성정은 뭐랄까. 고요한 다큐멘터리 영화 같았다.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원 테이크로 쭈욱. 같은 자연 풍경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자세히 보면 정신없이 움직이는 풀벌레며,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이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강물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루한, 그런 다큐멘터리 영화 같았다.
P가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게 된 데엔 환경적 요인도 컸다. 그는 이른바 '대 외향인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 시대에는 외향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우성인자처럼 받아들여졌다. 수업 시간에 손을 번쩍 발표하는 것은 우등생의 시그니처 씬이었고 면접장에서의 우렁한 목소리와 과격한 동작으로 하는 인사는 당연한 가이드라인이었다. 모임 자리에서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것, P에게는 너무 이상한 장면이었지만 다들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일들을 해냈다.
"훌륭한 일을 해낸 위인들 중에서도 조용한 성품의 사람들이 많아"
엄마는 위로를 담아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조용하게 세상을 움직인다?' P에게는 잘못된 수식처럼 느껴졌다.
세월이 흘러 MBTI라는 것이 전 세계적 유행이 되었다. MBTI를 묻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 되었고, 자신의 MBTI를 말하면 다들 '아 당신은 그렇군요'하고 이해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군가는 MBTI라는
것을 사람의 고유성을 훼손하는 나쁜 규정이라고 비난했지만 P는 참 고마웠다. MBTI라는 분류 속에서 내향성은 열성인자가 아닌 하나의 유형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니까. P는 자신의 성정에 조금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P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공간은 서점이었다. 서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고요하다. 고요함을 해치는 외향성은 서점이라는 세계 안에서는 오히려 열등인자로 작용하기도 했다. 서점에서 P는 자신만만하게 내향적이었다. 조심성 많은 초식동물처럼 행동하는 무리들 사이에 흠뻑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P는 휴식하고 싶을 때, 기분을 바뀌고 싶을 때, 스스로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을 때마다 서점을 찾았다.
23년 겨울의 칼바람을 총총걸음으로 헤쳐가던 저녁, P는 여느 때처럼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발꿈치를 들어요. 첫눈이 내려올 자리를 만들어요"
교보문고의 글판이 고요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은 광화문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좋은 글귀를 소개하자는 교보생명 신용호 창립자의 제안으로 1991년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1년에 네 번씩 사람들에게 새로운 글귀를 소개해왔다. 시나 명언 등에서 발췌해오기도 하고 BTS 같은 가수의 노래가사에서 가져오기도 한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올 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봄이 부서질까 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교보문고 글판은 늘 그자리에서 수많은 계절을 거치며 말을 건내고 있었다. 때로는 계절을 기대하게 하고, 때로운 영감을 주고, 때로는 위로를 건넸다.
P는 문득 깨달았다. 교보문고는 고요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는걸. 사람들을 따라다니거나 날 주목해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늘 그 자리에 머무르며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휴식하거나 공상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늘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아 조용하게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구나'
P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공간이 거대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