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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말보로

by 이백구십칠

P는 골초였었다. ‘였었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아니다.

P가 처음 담배를 배운 것은 20살 무렵.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 P의 주변에는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실 앞에 우르르 모여 친구들과 함께 담배를 피워댔다. 당시 담배는 일종의 관계 형성의 기제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데면데면했던 사이도 담배를 함께 피우고 골목길을 나서면 친밀도가 급상승하였고

평소 얘기하기 꺼려졌던 주제도 담배 연기와 함께라면 술술 나왔다.

개인적으로 P는 담배를 창작 도구 중 하나로 분류했다. 생각 노동 시간에 담배는 당연히 함께 해야 하는 도구였다. 담배가 없으면 발상력이 반 이상으로 줄어드는 것 같은 환각이 P를 지배했다. 때문에 난해한 과제를 앞에 둘 때면 손가락 사이엔 당연한 것처럼 담배가 끼워져 있었고 마감 시한이 다가 올 수록 담배는 더 빠르게 소각되어 갔다.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를 만나 후에야 P는 담배를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할지는 알지 못했다. 담배와 멀어지는 것은 철저히 의지의 영역이었고 경쟁심이라던가 승리 욕구 같은 것이 미미했던 P에게는 불리한 게임이었다. 호기롭게 금연을 선언하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장렬한 패배를 선언하기 일쑤였고 주변에는 금연 실천 중이라고 말하면서도 몰래 한 개비씩 피우는 궁상맞은 시절이 이어졌다.

‘의지’의 힘으로는 도무지 성공하지 못했던 금연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이직’이라는 현실적 사유였다. 새로운 회사에 우당탕탕 적응하는 기간 동안 P는 금연에 성공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라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던 나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출근길에는 그날의 업무에 대한 생각이 온 머릿속을 지배했고 일과 중에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에 치여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갔다. 퇴근길에는 누더기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 하드코어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몇 주가 지나고 또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어찌어찌 금연의 결정적 시기가 지나갔고 P의 몸은 담배가 없어도 큰 문제 없는 몸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얼렁뚱땅 성공해버렸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요상한 금연 성공기다.


골초 시절 P의 주머니에는 늘 말보로가 있었다. 특별히 향이 좋다던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노골적인 붉은색과 볼드한 로고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말로 '에겐남' 혹은 '초식남'에 가까운 P에게 말보로가 가진 마초남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추구미’였고 말보로를 피우는 순간만큼은 카우보이와 같은 건방진 자세로 서있을 수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P에게 말보로는 하나의 패션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입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힙하다고 느껴졌던 그런 패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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