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의 침대 옆 테이블에는 닌텐도 스위치가 있다. 꽤 큰맘 먹고 구매한 녀석이었지만 P는 그것의 존재를 잊었는지 손에 쥐는 날은 현격히 적다. 그랬기에 닌텐도 위에는 먼지가 쌓이고 쌓여 끈적일 정도로 달라붙었다. 충전 중임을 나타내는 작은 초록색 불빛만이 고장이나 방치돼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닌텐도가 자각을 가진 하나의 객체였다면 분명 P를 힐난했으리라. '이런 취급 할 거면 왜 들여놨냐?'라고 말이다.
P에게는 P 나름의 사정이 있다. 하위 욕구가 일정 수준 충족되어야 그다음의 상위 욕구가 생기기는 매슬로우 욕구 5단계처럼 P에게도 욕구의 단계가 존재했는데 게임을 할 욕구는 최상단에 가까운 욕구였다. 충분한 잠과 같은 휴식 욕구가 가장 하위인 5단계, 충분히 배가 찬 섭식 욕구가 4단계, 일이 P의 머릿속에 정돈되어 큰 걱정이 없는 업무 해결 욕구가 3단계 정도다. 적어도 이런 3단계의 하위 욕구가 채워진 후에야 비로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유희 욕구'가 생겨난다. 하지만 최근의 P는 제대로 된 휴식을, 만족스러운 식사를, 깔끔한 업무 정리를 좀처럼 해내지 못 해왔기에 유희 욕구의 도구인 닌텐도를 집어들 일이 없었다.
주말 아침, P는 노트북과 소설책과 닌텐도를 들고 동네 카페로 향했다. 순식간에 겨울이 되어버린 날씨 탓에 늘 마시던 아이스 커피 대신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와버렸기에 샌드위치도 추가로 주문했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커피를 홀짝 마시며 주중에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보고서를 작성해 나갔다. 업무에 있어 공간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인지 사무실에 앉아서는 좀처럼 발현되지 않던 아이디어들이 주말 아침의 카페 안에서는 쉽게 떠올랐고, P는 탄력을 받아 빠르게 보고서를 정리할 수 있었다.
곧 이어 한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썼다. 누구도 독촉하지 않는 혼자만의 원고지만 지난 한 달 동안은 한자도 쓰지 못했기에 P에겐 심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었다. 뭐라도 써야 한다는 적당한 압박감은 두뇌를 회전시키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키보드의 기분 좋은 타격음을 들으며 P는 타각 타각 글을 써 내려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만족스러운 감각이었다. 적어도 다음 주 초까지는 정돈되지 않을 일에 머리를 싸맬 일 없을 것이고 오랜만에 쓴 글을 P만의 원고 모임집를 한 겹더 두껍게 해줄 것이다.
P는 그제야 닌텐도를 집어 들었다. 닌텐도 안에서 좀비 떼를 사냥했고 빌딩 옥상 위를 뛰어다녔다. 야생말을 길들여 초원을 내달리고 쓰러져가는 마을을 되살렸다. 지금 P는 지극히 비생산적인 시간에 몰두하며 유희 욕구를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