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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Feb 07. 2022

인생의, <콩트가 시작된다>

2022년 2월 5일 토요일의 밤샘

이 글에는 일본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 영화 리뷰가 아닌 일본 드라마 리뷰. 요즈음은 뭘 보면 보는 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콘텐츠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짧든 길든 글을 쓰려고 노력 중이라 한국 영화 박스 오피스는 조금 뒤로 미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영화 박스 오피스는 내가 상업 영화에 대한 취향과 정말 멀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대체 이게 왜 그 해의 박스 오피스 1위지? 2위지? 긴가민가하는 작품들이 훨씬 많다.) 


아무튼, 나는 어릴 때부터 일본 작품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이게 닭과 달걀의 문제라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과 맞닿아서 일본 작품들을 좋아하게 된 건지,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자라서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또래의 여느 책 좀 읽는다던 놈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중학생 때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만나고 신세계를 접했다. 무라카미 류, 히가시노 게이고,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요시모토 바나나, 가네시로 가즈키, 온다 리쿠......, 지금은 잘 생각 안 나는 작품이 더 많지만 중학생 때는 이런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한국에서 아주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찾아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학교에서 읽어야 했던 한국 소설들은 한국 전쟁의 참담함이나 IMF 이후의 암담함 등을 담은 어두운 소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아직도 젊은 세대에게 공감을 산다는 것 때문에 작가 조세희가 안타까웠다고 했던 인터뷰를 얼핏 본 것 같다.) 일본 소설뿐만 아니라 그때는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한창 유행이었어서(나만 그랬나? 나랑 오타쿠 친구들만 그랬던 거야?) 당시에 일본어 공부도 엄청 많이 했고, 애니메이션도 많이 봤고, 친구들이랑 함께 일본 여행도 갔을 정도였으니 당시 내 일본 사랑은 당연했다. 


거기서 내가 일본 소설, 드라마, 영화에 그렇게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다는 점에 있었다. 요동치는 세계가 아니라, 요동치는 개인의 내면과 일상의 사소함에 꿋꿋하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집중하던 작품들이 좋았다. 이러한 일본의 작품 세계는 한편으로, 세계를 외면하고 개인의 감상에만 치중하는 면에서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인간 간의 관계나 한 사람 안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이야기,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나 풀, 나무에서 의미를 읽어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와 만났을 때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일본에서 '살아라!'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많은 작품의 주요 메시지가 될 정도로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아무튼, 한창 일본 작품을 많이 보다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일본 작품을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았다. 개개인의 내면보다도 더 약동하는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비해 일본 작품은 다소 시시했다. 너무 작은 것을 세세하게 다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게 때로는 어떤 집착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회사를 다니고 난 이후로는 가끔 일본 드라마를 찾아보았다. 그 드라마라는 게 어떤 거냐면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과 같은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별 내용이 없다. 회사를 그만둔 주인공이, 빵과 스프를 파는 가게를 열고 어느 날 고양이를 기르다가 그 고양이가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식이다. 그런데 그냥 그걸 보고 있는 게 좋았다. 무기력할 때는 그걸 보고 나면 빵과 스프 정도는 챙겨 먹고 싶어졌다. 이 커다란 '현실'이 나를 외면할 때, 일본 작품들을 보는 이유는 일종의 도피일지도 모른다. '괜찮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서론이 길었다. 아무튼, 오늘 리뷰를 쓰는 <콩트가 시작된다>는 그동안의 일본 드라마와 결을 같이 하면서도 또 다르다. 뭐랄까, 시시했던 사람이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을 보여 주거나 꿈을 이루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불량 소녀, 너를 응원해>와 같은, 그러고 보니 여기 나오는 주인공 아리무라 카스미가 <콩트가 시작된다>에도 나오는구나, 신기하다!!) 이 드라마는 10년 간 꿈을 쫓아오던 사람들이 그 꿈을 내려놓는 이야기다. 

사실 처음에는 제목도 그렇고 포스터도 그렇고 '이게 대체 무슨 드라마야..? 무슨 드라마인데 스다 마사키가 나와..?' 하는 마음에 궁금해서 봤는데 예상 별점이 4.5점에 달하는 거다. 요즈음 <은비적각락>을 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점점 더 불행으로 들어가는 게 마음이 안 좋아서 속도가 안 나고 있던 차에 그럼 딱 1화만 봐 볼까 하는 마음으로 켰던 게 오산이었다. 나는 세워 놓았던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하루 종일 <콩트가 시작된다>를 보며 밤을 새웠다. 대체 뭔 드라마길래?


드라마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학교 축제에서 콩트를 하게 된 두 친구, 하루토(스다 마사키 분)와 준페이(나카노 타이가 분)가 진지하게 콩트로 대성할 마음을 가지고 콩트 팀 '맥베스'를 꾸리며 시작된다. 거기에 슌타(카미키 류노스케 분)가 합류하며 3인조 콩트 그룹으로 활동한 지 10년 차다. 콩트 외길 인생 10년. 여전히 객석이 반도 차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대성할 날이 오리라 믿는 맥베스의 멤버들은 이제, 이 꿈을 멈추기로 한다.


이 드라마가 좋은 점은, 크게 세 가지다.


1. 드라마의 액자식 콩트 삽입 구성

1회 <물 문제> 중 한 장면

이 드라마는 약 1시간 정도의 분량으로, 드라마의 본 이야기가 진행되기 앞과 뒤에 '맥베스'가 짠 콩트가 나온다. 그래서 처음 1화가 시작할 때는 '대체.. 이게 무슨 드라마야?? 왜 스다 마사키가.. 저런 연기를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의아하게 된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이 묘하게 웃기지도 그렇다고 웃기지 않지도 않은 콩트에 어느샌가 중독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을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 나카하마 리호코(아리무라 카스미 분)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모두 다섯 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메인 주인공이라고 하자면 역시 맥베스의 리더 격이자 직접 콩트 대본을 쓰는 하루토와 이 맥베스의 골수 팬이 되어 버리는 리호코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그것도 몹시 나쁘게 헤어진다) 회사를 그만두고(그것도 아주 나쁘게 그만둔다) 폐인처럼 살던 리호코가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콩트를 버팀목 삼아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갔던 그 마음을 어쩐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별 의미가 없어 보인 이 콩트는 한 회를 다 보고 나면 그 회차의 에피소드들과 나름대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1화 <물 문제>에서는 손만 갖다 대면 물이 전부 멜론소다로 변하는 콩트가 사실은 리호코에 의해서 쓰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2화 <옥상>에서는 자살을 하려고 했던 슌타와 그걸 막은 하루토의 옥상에서의 첫 만남과 이어져 있고, 3화에서 <기적의 물>은 다단계 판매에 빠져 엉망이 된 삶을 살게 되는 형의 에피소드와 연결된다. 4회의 <버려진 고양이>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듯하지만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슌타의 이야기이며, 5회의 <노래방>은 '맥베스'가 드디어 해체를 결심하게 된 순간과 그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콩트들이 에피소드와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 실제 1회부터 10회까지의 콩트가 10회에 나오는 마지막 라이브의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이 묘하고 치밀한 구성에 어쩐지 마음이 찌릿해진다. 우리는 그들이 10년 동안 만들어온 콩트와 그들의 10년 동안의 추억을 단 10회 만에 손에 넣을 수 있다. 한편으로, 참 고맙지 않은가?


2. 인물 간의 관계성

에피소드 3, <기적의 물>에서 리호코가 울며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좋았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나는 인물 간의 관계성이 좋은 작품에 특히 애착이 간다. 그런 관계를 써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는 참 많은 관계가 나온다. 하루토, 준페이, 슌타 이 세 명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하루토-리호코, 준페이-나츠미(요시네 쿄코 분), 슌타-츠무기(후루카와 코토네 분), 리호코-츠무기 간의 관계까지 모두 세심하게 설정해 놓아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진다. 더욱이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일견 커플로 이어질 것처럼 보이는 하루토와 리호코를 그 선을 유지한 채 서로를 존중하고 있으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관계로 그리는 점이었다. 저런 사이라면 사랑에 빠져야 하지 않아?라고 얄팍하게 생각하는 드라마의 관습을 이제는 넘어서는 드라마가 많이 나와 참 좋다. 그렇지. 말이 통하는 사람, 혹은 더 알고 싶은 사람과 꼭 사랑을 할 필요는 없다. 사람 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아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잔뜩 나오는 드라마라 좋았다. 

재미있는 점은 또 하루토, 준페이, 슌타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였는데 나 역시 세 명이서 친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삼각형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관계가 더욱 재미있었다. 남들은 모르는 역사가 가득하지만 말만 꺼내면 걸핏하면 싸우는 하루토와 준페이의 사이는 건강하다. 둘은 정말 지겹도록 싸운다. 싸우는데 또 의기투합이 이렇게 잘될 수는 없다. 콩트를 하자고 꼬드긴 건 준페인데 그걸 누구보다 열심히 쓰는 건 하루토다. 또 하루토와 슌타의 관계는 어떤가? 이 둘의 관계는 사랑으로 해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애틋하다. 슌타는, 하루토가 웃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 삶에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확히 말한다. 하루토 역시 그 이야기를 우습게 듣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남자들은 정말 많이 운다! 정말 많이 울고, 속마음을 말하고, 싸우고 다투지만 결국에는 화해하고 한바탕 웃고 만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콩트 연습을 하고 밤새 회의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렇게 건강하고 성실한 인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역시,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역시 좋았던 것은 리호코와 츠무기, 이 자매 사이의 관계다. 폐인이 된 언니를 씻기고 먹이는 것은 츠무기고 그런 츠무기에게 넌지시 매니저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하는 것은 리호코다. 냉전으로 감정싸움을 했지만 반찬을 잔뜩 만들어 두는 게 동생이다. 자매가 있는 사람이 이 드라마를 보고 울지 않는 법은 모를 것이다. 또, 준페이의 여자 친구 나츠미가 열정적으로 리호코를 도와주는 점도 좋았다. 여자들은 대체로 끈끈하다. 그리고 나는 미디어에서 그런 면을 더욱 많이 보고 싶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좋다.


3. 메시지

포기할 줄 아는 것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인생은 어쩌면 콩트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지만 무엇이든 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별 볼 일 없던 고등학생들이 마침내 꿈을 이루어 최고의 콩트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졸업 이후에 아무것도 안 하고 콩트만 10년을 한 이들이 마침내 그 꿈을 접는 이야기다. 성공해서, 단 한 번은 잘되어서 그만두는 게 아니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기 때문에' 접는 것이다. 아직도 콩트를 하면 재미있는데, 언젠가 누군가는 알아줄 것도 같은데, 그만두는 게 맞는 걸까? 고민하던 이들은 마지막 라이브를 끝으로 10년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면 그것은 실패인가? 드라마는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로 나가기 두려워 보이던 인물들도 모두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꿈을 포기해서 패배자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콩트의 시절을, 그 챕터를 마치고 다음 챕터로 나아간다. 슌타는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고, 준페이는 가업을 잇고, 하루토는 자신의 콩트, <물 문제> 속 물 문제 777의 직원처럼 배관공이 되어 본다. 콩트를 10년이나 했는데도 스물여덟. 아마 한국 나이로는 스물아홉인 그들은 콩트로 빛나던 삶의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고 30대가 된다. 그들과 함께 직장에 가는 것이 무서웠던 리호코 역시 새로운 직장에 입사하고 하루하루 의미 없이 살던 츠무기 역시 자신만의 일을 찾는다. 일순, 삶이 저렇게 잘 마무리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싶다가도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을 기회 삼아 움직이는 편이 그렇지 않고 푸념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는 주인공들의 말에 어쩐지 수긍하게 된다. 그때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선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찍이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연설에서 'Connecting the dots'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에서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언젠가는 다 쓸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시그널을 알아채느냐 채지 못 하느냐는, 내 삶에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린지도 모른다. 

덧붙여 좋았던 점은, 이 드라마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언제나 뭐든지 열성이고 진지한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게 싫었다. 이 드라마의 모든 사람들은 성실하고 진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고, 그렇기 때문에 그 상처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떨 땐 위로가 된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좋은 드라마를 보고 났더니 할 말이 참 많아지네. 아무튼 오랜만에 좋은 드라마를 봐서 좋았다. <하코즈메 파출소 여자들>이라는 드라마도 참 좋았는데 이렇게 글로 써 뒀으면 좋았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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