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가 비누, 재하에게 | 그리고 비누와 재하로부터
#2. 어느 지점 이상인 곳에선, 우린 이상하지 않아
재하, 비누 안녕!
나는 제주도에서 막 망원동 집에 도착했어.
여행 도파민은 참 무섭다.
피곤함을 끌어안고 메일 쓰는 밤 열한 시-
아직도 각성이 가라앉지 않네.
또 서울에서 붕 떠버린 기분이야. 근사하게도 말이죠.
맞아, 나는 이 도시를 딛고서도
두 발 이외의 것들은 저 위로 띄워 버리는 걸 좋아해.
영화관에 숨어서 다른 세상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한강을 뛰면서 숨을 강 위로 띄우거나,
제일 쉽게는 술에 취해서 정신을 놓거나~~
그런 방법으로 말이야.
그리고 요즘은 매주 등산하고 있어.
이건 두발까지 띄우는 느낌이더라고?
feel sooooo high!!!
걷잡을 수 없어진 등산 도파민 중독에
결국 이번 주말은 가방을 싸서 더 높은 산으로 향했어.
한라산으로!
그리고 난 해발 1,700미터까지 떠서야
이 도시에서는 볼 수 없던
우리 같은 우리를 만날 수 있었어.
1. 하늘과 제일 가까운 바다
재하야 '수해'라는 단어를 아니?
나무 수. 바다 해.
나무의 바다라는 뜻인데 숲을 뜻한대.
한라산을 오르니까 정말 보지 못한 나무들이
주변 눈치도 안 보고 멋대로 비죽비죽 솟아있어.
자라다가 멈춰버린 나무, 추위에 새하얗게 얼어버린 나무,
중심을 잡고 커다랗게 솟은 나무,
마수리 앞머리처럼 잎 몇 개만 단풍을 물들인 나무,
새에게 열매를 내어주는 나무 등등
다들 모양새도 사는 태도도 제각각이야.
각기 제멋대로니까, 그 사이를 걷는데 좀 웃기더라고.
이질적이니까 이상함을 넘어서 괴상한 거야.
그런데 어느 정도 정상 가까이 오르고,
내가 온 길을 뒤 돌아보니 너무나 절경인 거지.
그때서야 인지한 거야.
다양한 경험을 삶의 대지에 거침없이 심는
민재하는 나무가 아니라 수해구나.
2. 세상 꼿꼿한 가장 작은 존재
비누야, 한라산에는 고산지역에서만 사는 꽃들이 많아.
아바타나 블랙팬서에서 자주 애용하는(?) 보라 혹은 오렌지빛 네온 컬러를 가지고
꽃 같지 않은 위협적인 모양새로 나무처럼 줄기를 세우고 서 있어.
근데 희한하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은 들꽃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서울의 아스팔트나 공원에 툭툭 피어있는
파스텔톤 작은 들꽃 말이야.
이 봐! 익숙한 꽃이지?
땅이 끄는 중력을 뿌리치고, 작은 씨앗인 몸으로 바람에 올라타서는
해발 1,700위 화강암에 비집고 자리를 잡았어.
그리고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얇은 꽃잎들을 힘껏 내뻗고 있어.
이 모습을 찬찬히 보고 있으니까
마음속에 뜨거움이 울컥 올라오더라.
어느 날 트랙26에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곽비누 그 자체였으니까.
어때?
높이 떠서야 만난 우리 같은 우리.
사실, 매일 우리가 이상하냐고 묻는 너희에게,
매번 답하기 곤란했었어.
정말 우리가 많이 이상하면 어쩌지?
주변 눈치를 봤던 거 같아.
근데 이번에 한라산에서 두 시간 만에 깨달았어.
우리를 품기엔 서울은 너무 낮고 또 쉬워.
어느 지점 이상인 곳에선, 우린 이상하지 않아!
한라산 기운을 업고 한껏 거만해진
유나가
2022. 10. 05. 오전 1:28
Re:이상의 이상을 위한 이상에 의한 이상한
역시 여행 후에 편지까지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구나,
생각했는데 편지가 도착했을 때,
그 편지에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쓰여 있을 때,
그렇게 모든 타이밍이 계시처럼 느껴질 때,
그 순간을 부르는 독일어가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 도서관이야.
이번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서
어제부터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는데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 같아서 웃기고 재미있어.
그때는 지겹기만 했던 것 같은데.
어제는 도서관 내부에 구내식당을 발견해서
거기서 식사를 두 끼나 해결하고
보고 싶었던 책을 몇 권 뽑아 뒤적이고
창문을 내다보며 멍 때리다가
서류를 고치고 나면 해가 져.
열심히 살고 싶다가 적당히 살고 싶다가 해.
언니가 여행을 간 걸 보니까 괜히 나까지 들뜨는 바람에
잠시 쉬며 답장을 쓰는 거니까 약간의 딴짓은 봐줘.
역시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위도와 경도를 바꾸기 위해 떠나는 건가 봐.
해발 1,700미터 위에서도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도서관 안의 나도 그다지 애석하지 않아.
문득 언니 편지를 받고
"내가 이상한 거야?"하고 물을 때,
이상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싶어 검색해 봤거든.
'이상'이라는 단어에는 서로 다른 뜻이 15개나 있더라.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거야?"라고 물을 때
몇 번째 이상인지 각주를 붙여야 할 정도라니까.
재미있는 건 이거야.
같은 발음으로 이토록 상반된 뜻을 나타내다니 웃기지 않아?
한동안 국어사전을 뒤지며 수많은 이상을 검색하다가
좋은 친구란 무릇
내가 이상¹¹한 건지 고민할 때
가장 이상⁸적인 내 모습을 발견해 주는 이인 동시에
'이상'이란 말의 이상²까지도 생각하게 하는 존재구나 싶었어.
나는 이 이상¹²을 가히 이상¹⁴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상⁴.
이렇게까지 이상이라는 말을 많이 쓸 수 있구나.
편지를 받고
헉, 이 에피소드는 이 편지 시리즈가 끝날쯤 나왔으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뭐 어때.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고 염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편지도 계속될 텐데.
얼마 전에 읽은『아름다움의 구원』(한병철, 2016)이라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와.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른 것을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p.54
타인의 세계는 부지불식간 나를 상처 입힐 수 있지.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쉽지 않나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봐 줘서 고마워.
무해하다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 나는 왜 그 단어가 오용되는 것 같은지,
그게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
역시, 내가 이상⁽ⁿ⁾한 건가?
아무튼 나는 둘째치고 언니는 참 이상해.
몇 번째 이상일지는 언니가 정해 줘.
어떤 이상이든, 나한테 유나는 유나일 테니까.
사랑을 담아,
비누
2022. 10. 05. 오후 3:14
아!
추신.
나 어릴 땐 왜 그렇게 내 동생이 나를 따라 하는지 몰랐는데
나도 동생이 되어 보니까 알겠어.
언니들이 하는 건 다 멋있어 보이는구나.
조만간 내가 등산 다닌다고 해도 놀라지 마.
2022. 10. 05. 오후 3:16
Re: 제목없음
유나야
사실 지금 메일을 쓸 것이 아니었다면 네게 당장 카톡을 했을 거야.
언제나처럼
“유나야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 로 시작하는
뜬금없는 내용의 카톡.
나는 지금 서울역이야. 울산에 내려가는 중이야.
어제 비누의 말이 나의 무의식까지 다독인 것일까?
웬일로 천하의 내가 기차 출발 시간보다 40분이나 일찍 역에 도착했어.
매번 절체절명의 순간을 겪고서야 기차를 탔었는데 말야.
지하철을 탄 순간부터 정차하고 출발하는 역마다 1분 단위로 시간을 체크하고.
서울역 1호선 10-4 지점에서 내려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와서
15번 출구를 30초 안에 돌진한 뒤
스토리웨이 편의점이 보이면 왼편이 아닌 오른쪽으로 꺾어서
햄스트링과 종아리에 힘을 주고 계단을 전속력으로 올라오면.
출발 시각 1분 남기고 기차에 오르곤 했는데 말이야…….
(이게 서울역 1호선에서 ktx까지 환승하는 최단 경로야^^.. 너도 필요할 것 같아서..ㅎ)
이럴 때마다 지독한 p 성향의 인간에겐 j의 면모가 짙게 보이는 것 같아.
(막 엄청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하잖아? 그게 j 아냐?)
역시 극단은 통하는 걸까?
무튼.. 오늘은 간절함 없이 서울역에 도착했고.
시간이 많이 남아서 최단 경로가 아닌
최애 경로로 1호선에서 ktx로 환승을 했어.
그 길에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하늘을 만났지.
멈춰 서서 카메라에 하늘을 담았고.
여운을 이끌고 걸음을 내몰지 않았어.
그 자리에 서서 여운을 소진했어.
그러다 주위를 돌아봤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찍고 있는 거야..
다들 엄청 행복한 표정을 품고서 말야..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뭔가 울컥했어.
그냥 저들에게 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걸을 수 있는,
그리고 멈춰서 하늘을 누릴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게
너무 좋았고.
그러고 있는 우리 모두가 기특해서..
어디에 고마워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저들의 삶 속에 이런 순간들이 잦길 바라서.
그냥 사람들이 행복한 게 참 행복했어.
그런데 말야.
난 사실 이름도 얼굴도 내면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이런 마음이 품어질 때마다
내가 너무 싫어져.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폐가 되는지 30년 넘게 겪어왔으면서.
맨날천날 사람이 제일 싫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이 무슨 모순인가 싶어져서.
그치만 내가 나를 싫어하는 건 너무 피곤하니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거지.
몰라서 가능한 거다.
이렇게 타인을 어여삐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사소한 행동 한 땀 한 땀에 행복을 깁는 것은.
그 행복이 끊기지 않길 바라는 것은.
행여 잘못 꿰맨 부분이 있을지라도
풀어 헤쳐 다시 꿰매지 않고
그대로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을 싫어할 수 있다고 다짐해보는데.
결국 매번 실패해.
나를 너무 잘 아는 네가
나를 그렇게 아름답게 바라볼 때마다.
투박하고 고집 센 나무둥치에
지저분한 가지를 끝도 없이 매달던 나를
이름부터 아름답기 그지없는
‘수해’라 부르는 너 때문에.
지난 몇 년간 누군가 내게
(좋은 의미로)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라 물을 때마다
나는 “제겐 좋은 친구들이 있거든요.” 란 답으로 일관해왔어.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건 유나였고.
비누였어.
이렇게 또 네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고 하기 뭣한
내 할 말로 가득한 메일로 답장을 대신해본다.
나는 샤워를 하거나 바이크를 타고 다닐 때
큰소리로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처럼
대놓고 절절한 노래들을 즐겨 부르고.
바람에, 물길에 노랫소리를 흘려보내는 마음으로
메일을 핑계 삼아 친구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흘려본다.
사랑으로 재하가.
2022. 10. 07. 오후 8:46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