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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Oct 17. 2022

#03. 기차는 오고 가고

재하가 비누, 유나에게 | 그리고 비누와 유나로부터

#3. 기차는 오고 가고, 편지는 주고받고

안녕! 비누 유나, 그리고 유나 비누 

나는 지금 리터럴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이야. 

춘천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이지.

유나에게 보내는 답장은 울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썼는데.

자꾸 출발점과 도착점을 잇는 선 위에서 편지를 쓰게 되네.

그래서 왠지 더 너희와 이어진 기분이 들고,

한편으론 정말 먼 곳에서 말을 걸고 있는 듯하고 그래.

애틋해지네 괜히.


이번엔 거제에 있는 친구들이 울산의 간월재에 가보고 싶어 해서

울산엘 다녀왔어. 

춘천에서 다른 친구 한 명도 내려왔고.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친구들이 울산에 놀러 온 건 또 처음이었네.


조금 더 어렸을 땐 이상하게도 나의 고향을 울산이라고 말하는 것이 싫었어.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떤 장소와 내가 정확히 연결되는 것이 싫었나 봐.

고향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저는 태어난 건 부산이긴 한데, 3살 때쯤 서울에 올라가서 살다가.. 초등학교 때 울산에 내려왔고..

스무 살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요.. 어디가 고향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내가 ‘울산 사람’이 되는 것이 싫었어. 

그건 울산이 아닌 그 어디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당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정의되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했었어.

고향이란 장소가 내게 어떤 이미지를 씌우는 게 싫었어. 


하지만 이젠 어떤 식으로든 울산과 내가 연결되어 

친구들이 그곳을 생각하며 나를 떠올리고,

나를 만나러 찾아와 주는 것이 마냥 고맙고 행복해.


그와 마찬가지로 정의되는 일도 좋아졌어.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껏 나를 정의하고 묘사해주면 즐겁고 재미나.

뭐 물론 기분 나쁠 때도 있지만 그 사건을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 또한 재미나니까.

(뒷담 깐다는 말을 고상하게 표현해보려는 노력이 보이니?)


무튼 놀러 온 친구들은 울산에 있는 크로스핏 박스에 운동을 하러 갔는데.

나는 춘천에서 오후 일정이 있어서 홀로 일찍 올라가고 있어.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었더라면 나도 충분히 함께 운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춘천에 살고부터 울산에 오고 가는 시간이 정말 길어졌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돌아오는 주말엔 또 다른 친구들과 

낙동 정맥 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경북 봉화에 갈 거야. 

강릉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강릉에서 영동선을 타고 내려갈 계획이야.

그런데 봉화에서 춘천으로 다시 돌아오는 차편을 구하지 못해서 

큰 난항을 겪을 것 같아. 

아무래도 춘천은 서울에 비하면 교통편이 좋지 못해서

어딘가를 오고 가는 일이 참 고되고 어렵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울에 살 때보다

더 먼 곳을 보다 더 자주 다니게 된 것 같아. 

어딜 가든 여정이 순탄치 않으니

교통편이 불편한 것쯤은 목적지를 선택하는 데에

큰 지장을 주지 않게 되었어.

어떤 곳을 택하든 오가는 길은 언제나 시간과 품이 많이 드니까.

오히려 선택에서 자유로워지고, 

선택에서 자유로워지니 뭐든 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


우리는 최고의,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못하기도 하잖아.


어떤 행위에서 조금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오히려 그 행위를 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아?


무언가를 내 인생 안에 두고 함께 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람이든, 행위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간에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가 필요한 것 같아. 


아, 이제 서울역에 도착하려나 보다.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과는 달리

용산역에서 갈아타야 하는 itx 열차 시간을 아주 빡빡하게 끊어뒀어.

헐레벌떡 이동하려면 마음의 준비 운동을 단단히 해야 해.

이만 가볼게.


두 장의 답장과 한 장의 편지를 쓰고 나니 

더욱 고마움이 밀려든다.

편지를 주고받자고 해줘서 정말 고마워 유나야 비누야.


사랑으로 재하가.

2022. 10. 12. 오전 1:03




Re: 화성으로 이주하지만 않는다면, 거기가 어디든

편지를 쓴다는 건 일기를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또 편지는 부치기 위해 쓰는 것이기도 하고

(여러 사정에 의해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는 것은 논외로 하자)

주고받는 사람 간의 거리가 있다는 것도 일기와는 다르겠지.


기차 위의 편지는 재미있다.

재하가 가만히 있더라도 기차가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가.

이동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런 건가.

재하는 편지 속에서도 계속 움직이네.

그러고 보면 재하는 늘 움직이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2013년부터 2014년까지

1년 반 동안(중간에 내가 중국으로 튀었기 때문에, 찡긋)

재하를 매주 토요일마다 만났다는 게 이상해서

앞으로 살면서 또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어서

때론 밉기도 시간 낭비 같기도 했던 그 시절이 고맙다.


십키로그램짜리 배낭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훌쩍 떠나는 재하.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떠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한 얼굴로 돌아오는 재하.

그런 재하에게 나도 배낭 하나만 들고 떠나는 법을 배웠어.


나보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치앙마이로 갔을 때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에 속아 30,000보를 걸었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울산이나 대구에 갔을 때

울산의 마스코트가 '해울'이라는 이름의 고래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대구에서 링 위에 올라 정정당당히 겨루고 있는 사람이 내 친구일 때

그때 전부 재하가 있었지.

그건 전부 재하 때문에 떠나게 된 거였지.

나처럼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마저 고민하는 애에게

언니만큼 좋은 선생님은 없었던 것 같아.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들도

지구 어딘가에서 재하도 하고 있단 생각이 들면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해져서

나도 힘을 낼 수 있거든.

이상하지? (몇 번째 이상일까?)


2013년으로부터 올해가 꼭 10년째라는 거,

알고 있었어?

어릴 땐 그렇게 몇 년씩 친한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거든.

그렇지만 이제는 부럽지 않아.

이 초연함에는 분명 나를 정의하지 않고도 

나를 나로 사랑해 준 재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

그것도 알고 있었어?

난 반대로 내가 재하를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친한지 보여 주고 싶어서

재하를 캐해하기 바빴는데 말이야. (ㅋㅋ)

어쨌든

이전 같았으면 재하가

"내가 이상한 거야?"라고 물었을 법한 이야기에 이미

자신만의 답이 내려져 있어 즐겁다.

누가 뭐래도 나는 성장 서사가 좋고

재하의 성장에 관해서라면

10년어치를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으니까.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데 어제는 카페에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날씨가 너무 좋길래 하늘공원에 다녀왔어.

여름엔 사람이 없어서

그 땅이 다 내 것 같았는데

어제는 쉬는 날처럼 사람이 많더라.

오늘부터 억새 축제가 시작된다나 뭐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원두막 하나를 전세 내서 한참 책을 읽다가 일몰 시간이 돼서 

해가 지는 것을 보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는 강박도 없이

그저 아름다워 좋았어.


우리 사이도 그렇다고 생각해.

지구와 달처럼 만날 수 없는 것은 너무 슬프니까

지금처럼 자연스럽고 알맞은 궤도로

언제나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거리에서

사랑을 보내자.

언니는 언니답게 계속 무거운 가방을 들고

뛰고, 걷고, 누비도록 해.

거기가 어디든 (병이 나지 않을 선에서) 따라갈 테니까!

트래킹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사랑을 담아, 

비누

2022. 10. 14. 오후 5:15



Re: 기행을 잘하는 사람에게

참 재하 같다. 네 편지는 늘 요란하고 바빠.


뛰어왔으며 또 곧장 뛰어야 하고,

숨 가쁘게 땀 흘리고 몸을 움직인 이야기를 써.

그리고 방금 어딘가에서 왔는데 또 어딘가를 가야 한대.


그래서 덩달아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나도 가슴이 요동쳐.

이런 걸 보면 재하 편지는 기행문이 아닐까?


난 '기행'이라는 단어를 보면 너부터 떠올려.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마구 배낭에 욱여넣어서

이리 굴리고 저리 부딪친 뒤 지퍼를 지-익 열어보면,

떠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 눈부신 덩어리. 그걸 기행이라고 하잖아.

이 기행의 자태가 네 몸가짐과 똑 닮았어.


게다가 네 기행은 '기'이한 '행'동까지 더해지잖아?

몸만 한 배낭을 멘 채,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서슴없이 즐기고

(대게 이걸 '길 잃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재하는 '그냥 걷다 보니'라고 말하지ㅋㅋ) 

대뜸 길에 앉아서 양말을 벗어 재끼고, 발가락을 쭉 편 채로 맥주캔을 까고

어쩌면 춘천에서 서울까지 애플 워치 하나 사러 오는 것까지!

(요즘은 ㅋㅍ으로 당일 배송도 되는데 말이죠)


기행을 일삼는 기행의 인간형 민재하!


재하야-

난 여행은 일종의 수련이라는 생각이 들어.

길을 밟아 나가면서 내 인생 그리고 성정을 다듬는 거 같거든.


재하는 그런 면에서 단련된 '장인' 같아.

고되고 어려운 길목에서

기합을 넣고 더 박차를 가해 너를 극으로 치닫게 만드니까-

그게 누군가에게는 기이해 보여도 말이지.


지금은 낙동 정맥에서 어떤 자세로

여행을 연마하고 트래킹을 간파하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이상하고 힘이 세다.


재하의 기운을 그리며,

유나

2022. 10. 15. 오후 5:53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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