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가 재하, 유나에게 | 그리고 유나와 재하로부터
#4. Jinx! Jinx again!
언니들, 안녕?
처음 이 편지를 쓰기로 정했던 때
올해가 딱 100일 남았었지.
유나는 취해서 졸고,
재하는 맥주를 한 캔 더 마시겠다더니 잠든 날.
그로부터 벌써 3주가 지났다.
작심 3주는 된 거야.
우리가 기특해.
오늘은 나의 어떤 이상한 점을 털어놓을까 하다가
몇 개의 후보가 있었는데
갑자기 징크스 이야기를 하고 싶더라고.
언니들은 징크스가 있어?
나는 예전에 이 이야기를 쓴 적도 있더라.
(징크스를 너무 생각하는 인간만 징크스를 갖게 되는 거 아닐까?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
우선 내 징크스는 이래.
1) 중요한 경기는 내가 보면 진다.
(한일전, 올림픽, 월드컵 등)
2) 비가 그쳤다가도 내가 나갈 때는 비가 온다.
3) 준비하고 있는 큰 일은 미리 말하면 잘 안 된다.
사실 3번이 문제지.
왜 그럴까?
무조건적인 것만도 아니지만,
자주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
이번 여름 촬영만 해도 작업 일지를 썼었잖아?
블로그에 소문을 내서 그런지 촬영이 계속 밀린 것 같아서
중간에 그만 썼던 거거든.
그걸 여태까지 못 쓰고 있어.
무서워서. ㅋㅋ
전시 준비하는 것도 과정은 꽁꽁 숨겼고.
왜 아무도 모르게 해야만 일이 성사되는 걸까?
나도 좀 드러내고 싶은데.
매번 입이 참 근질거려.
혹시 이 징크스가 내게 침묵과 인내를 가르치는 걸까,
그런 생각도 해 봐.
......
...
그래도 짜증 난다고......!
언젠가 이 징크스를 깰 수 있으려나.
내가 말의 힘을 너무 믿는 사람인 이상 계속 그럴까?
난 불행한 일을 입 밖으로 내는 걸 어릴 때부터 병적으로 싫어했거든.
자랑할 일이 생겨도 많이 안 했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것처럼
어디선가 내 운을 관장하는 요정이
(직원이겠지? 계약직? 정규직?)
내 행운과 불행을 듣고
운을 삭감하거나 증액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좋은 일은 좋은 대로 나쁜 일은 나쁜 대로
속에 감추고 산 것 같아.
언니들은 어때?
역시 내가 이상해?
궁금해서 징크스의 어원을 찾아봤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마술에 쓰던 개미잡이라는 새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Captain Jinks of the Horse Marines(기병대장 징크스)라는 노래에서
기병대장 징크스가 나팔소리 때문에 갑자기 병이 나거나
말에 올라타려는데 모자가 떨어졌다는 둥 (어쩌라고)
그런 일이 계속됐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대.
노래가 생각보다 웃겨. 한번 들어봐.
갑자기 징크스고 뭐고 다 우스워지는 멜로디 같아.
그러다가 징크스도 결국 핑계일까?
생각해 봤어.
엊그제는 양자경의 멀티버스를 봤는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제목 왜 이렇게 그대로 했담)
울다가 웃어서 바보 같은 얼굴로 귀가했어.
평행 우주에서는 나보다 나은 버전의 내가 열심히 살고 있겠지?
어떤 우주의 나는 남자이거나 고양이일 수도 있겠지?
내 운을 그들과 나눠 쓰고 있겠지?
그래도 언니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역시 이번 생에서인 것 같다.
그 모든 우주의 비누들에게도
반드시 또 다른 재하와 유나가 함께하기를.
사랑을 담아,
비누
2022. 10. 17. 오후 5:44
Re: 징크스가 없는 나는 가엾다
안녕 비누!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지?
일요일이 1시간 20분이 남았으니까.
(*본 콘텐츠는 매주 월요일 한 명이 메일을 쓰고 일요일까지 나머지 두 명이 답장을 쓰는 룰이 세팅되어 있습니다^^;)
난 마감 시간 훨씬 전에 무언가를 끝내면
그 결과물이 늘 별로인 징크스가 있어...는 아니고
그냥 내가 느리고 게으릅니다. 죄송합니다.
난 이런 식의 징크스가 핑계인 사람들이 싫거든.
우리 비누 징크스는 그런 오만함이 없네.
징크스 이야기를 하자면-
난 수능 칠 때까지 징글징글한 징크스가 있었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시험 전날 공부한 옷을 입고 시험을 쳐야 점수가 잘 나온다.’는 마법에 걸렸었어.
시험 전날 옷에 벼락치기 기운을 한껏 묻힌 다음!
그 옷을 입고 시험을 치면, 결과가 제법 괜찮더라고.
그래서 이 슬픈 운명을 교복처럼 입은 채-
중학교 때부터 수능까지 6년 동안, 시험 전날에 입은 애착 티셔츠들을 입고 꼬질꼬질 오엠알카드를 칠했어.
이 마법은 대학 입학 이후, 남들 다 보는 토익, 인적성검사 등등의 시험도 쳐보지 않게 되면서 자동 해제됐지 뭐-
(@: 대학 때도 중간 기말은 있잖아요?
ㄴ 조용히 하세요^^)
꾀죄죄한 징크스에 오랫동안 당했으면서
징크스가 세 개나 있는 비누가 부럽다.
징크스는 잡초처럼 불쑥 생기는 게 아니잖아.
이루고 싶은 열망과 욕심이 깃든 노력,
거저 가질 수 없는 운명 등등을 먹고 자라는
푸른 난초 같은 거지.
(제가 작은 아씨들에 미친 사람 같나요?)
이 징크스가 괴롭지만 아름다운 건, 진실의 말을 해서 그럴 거야.
'너 예전에도 이렇게 하다가 일을 그르쳤다구! 그딴 짓은 여기서 멈춰. 다시 생각해.'
원하는 바가 크면 클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그래서 반성을 놓치고 조언을 흘려듣는 경우가 많잖아.
그때 징크스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고쳐먹는 거 아닐까?
조급함 때문에 한계선에 너머로 뛰쳐나가지 않도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부딪치지 않도록.
비누에겐 “준비하고 있는 큰일은 미리 말하면 잘 안된다.” 이 마법이 좋은 페이스를 만들어준 거 같아.
블로그에 계속 작업일지를 쓰면서 작업했다면
반성에 반성을 더해 자책으로 더 괴로웠을지도?
지나가던 괜한 비판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네 비범함에 누군가의 시기를 받았을지도!!!!
이렇게 따라오는 리스크들이 제법 큰 걸-
나는 스무 살 이후부터 간절히 원하는 게 없나 봐.
요즘 내 인생은 잡초만 무성한 들판이네요.
(잡초라도 좀 쳐내면, 숨어있던 난초가 보일까?)
그래서 비누 메일을 받고
‘아, 노징크스-버스에 사는 나는
매일이 느슨하고 간절함이 없어서 가엾다.’
드라마퀸같은 생각 했어.
5년 안에는 날 긴장시킬 징크스 하나 만들고 싶다.
어떤 일이든 팽팽한 계획으로 뜨겁게 해내는 비누처럼!
+ 아! 나 중고등학교 때, 세 명이 친하면 꼭 나만 소외되는 징크스가 있었다. 이걸 내가 깼다고 생각하면 좀 뿌듯한데?
존경과 사랑까지 더해
유나가
2022. 10. 27. 오전 9:31
Re: 징크스를 가질 자격이 있는 비누에게
안녕 우리 비누.
나는 방금 작은 아씨들 마지막 화를 끝냈어.
드라마를 잘 못 보는 편인데도
정말 오랜만에 미친 듯이 몰입해서 봤어.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재밌어서 이번 주말 꼼짝없이 작은 아씨들에 묶여있었어.
재미있단 이야기들이 많아서 봐야지, 봐야지 했지만
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온 것이 제대로 방아쇠를 당겨줬어.
네가 하는 걸 내가 얼마나 같이 하고 싶어 하는지 아니?
네가 보는 영화, 드라마, 책
네가 마시는 와인 위스키
비누가 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좋아 보이는 것도 있지만
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같이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어서 따라 하는 것이 더 큰 이유야.
개봉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보는 이유가
그 영화를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
따끈따끈하게 올라온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를 미루지 않고 듣고 싶어서도 있는 것처럼 말야.
너를 따라가며 나의 세계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어.
확장된 가상 세계를 메타버스라고 한다면
나의 확장된 현실 세계는 비누버스인건가?
그나저나
세상에 언니 따라 하고 싶어 하는 동생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는데
동생이 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언니 이야기도 있니?
없다면 내가 첫 번째인 건가? 후훗
비누 메일을 읽고
징크스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
내겐 어떤 징크스가 있을까 하고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질 않더라구.
왜 난 징크스가 없을까? 고민을 해봤는데.
우선 난 일어난 일에 대해 잘 잊어버려.
그래서인지 반성을 잘 못해.
나쁜 일도 지나고 나면 귀찮아서 그냥 떠나 보내.
다음에 또 이 일이 되풀이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혹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어쩌면 좋을지 생각하질 못 해.
또 일어나면 그냥 다시 겪는 거야.
효율적이지 못하게 말야.
징크스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지난 일에 대해 복기하고 생각해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노력하기 때문인 것 같아.
그런 사람들만이 징크스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내게 징크스가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
징크스를 운운하기엔 내가 하는 일들엔
내가 낸 구멍들이 너무 많아.
미리미리 시작하지 않고 너무 급하게 준비하느라.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하는 것들을 귀찮아서 하지 않아서.
끝내야 할 시간에 임박해 마음이 너무 급해 대충 하느라.
그런 나는 징크스를 가질 자격이 없는 거야.
비누야 징크스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운동선수들인 거 알고 있니?
그건 아마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스포츠란 세계에선
큰 힘을 행사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실패라는 게 존재하는 곳이라서.
비누는 그런 운동선수들인 거야.
비누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비누 탓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 있는 거야.
비누의 책임이 될 수 있을 모든 걸 최선을 다해 준비했기에
징크스를 가질 권리도 있는 거지.
‘신’이란 게 너무나도 중요하고 큰 역할을 했던
중세 시대를 지나
인간의 자아가 중요해진 근대에 오고 나선 말이야.
신이 지던 책임들을 모두 인간이 지기 시작했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일어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들도 모두 인간의 것이 된 거야.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있잖아.
그런 순간에도 인간이 모든 책임을 자신으로 돌리다 보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사실 너무나 근대적인 인간인 나는
신에게 탓을 돌리는 것으로 마음이 풀어지지 않지만.
징크스나 사주 탓을 해버리는 건 괜찮은 것 같아.
그러니 비누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네게
징크스는 핑계가 아닌 노력의 대가이자 권리야.
아 맞아.
나 금요일에 드디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왔어.
비누야 쓰고 싶은 말이 많아서
줄줄 메일을 쓰다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어서
죄다 지워버렸어.
음 다만 남기고 싶은 말은
다른 평행우주에 있는 나에게도 비누와 유나 같은 존재는 있을 것 같단 말.
그게 아니라면 그 나는 너무 고독하고 외로울 것 같아서.
안녕. 오늘도 사랑으로.
재하가
2022. 10. 24. 오전 12:38
추신.
메일을 보내고 난 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생각을 해봤어.
나는 영화를 보고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비누야 나는 여전히 철없는 허세 인간처럼..
어딘가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란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어.
딱히 어떤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은 곳이 있거나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을 못 견딜 만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여기 아닌 어딘가 이곳 아닌 저곳에서의 삶을
놓치고 있단 생각이 날 놓아주질 않아.
지금껏 나는 계속 이걸 공간의 문제로만 생각을 해왔는데.
문득 시간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여기가 아닌 더 나은 곳은 내일. 한 달 뒤. 일 년 뒤의 그곳.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난 최선을 다해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미련의 힘으로 말이야.
미래와 미련을 나란히 놓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미련이란 단어 말곤 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네.
어쩐지 다 쓰고 나니 영화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 같지만.
이곳이든 그곳이든 언제나 함께해 줘서 고마워.
그럼 다시 사랑으로.
2022. 10. 24. 오전 8:10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