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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Nov 22. 2022

#06. 당해낼 수 없어 당할 수밖에 없는 감정

재하가 비누, 유나에게 | 그리고 비누와 유나로부터

#6. 당해낼 수 없어 당할 수밖에 없는 감정에 대하여

안녕 비누

안녕 유나

안녕 비누와 유나.

다들 금요일 저녁은 어떻게 보내고 있어?

나는 춘천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카페에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시켜 마시고 있어.

빈속이라 알콜이 목구멍을 지나 아랫배까지 타고 내려가는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져.

건강에 좋지 못한 짓을 하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꼴이 조금 우습다.

그치만 와인이 몸속을 유영하는 찰나를 찬찬히 느껴볼 수 있는 이 여유가 너무 좋아.

이번 주는 정말 너무 정신이 없었어.

삼각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면서도 삼각김밥의 김이 온전히 밥에 붙어있을 수 있도록

조심히 포장지를 벗겨 낼 마음의 여유도 부족해서 반나체의 삼각김밥을 우적우적거렸어.

그런 와중에도 운동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게 참 억지스럽지만.

아무리 바빠도 다들 화장실은 가잖아?


친구들 오늘은 요즘 나를 가장 크게 사로잡고 있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

사실 오래된 감정이기도 한데, 지금까지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그치만 요즘은 어쩐지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서. 대체 왜 이런 감정에 이토록 휩싸이는 것인지.

나는 자꾸만 많은 일에 지나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임감과 죄책감이 많은 일에서 나를 덮쳐.


(친구들 'emotion' 이란 단어가 생기기 전에 감정은 영어로 'passion'이란 단어였는데.

'passion' 이란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patio'에 있대.

'patio'는 '겪다', '당하다'라는 뜻인데, 그 당시 사람들은 감정을 완전히 수동적인 것으로 바라본 것이지.

감정은 내가 능동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그냥 겪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란 거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문득 궁금해져서)


2008년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그 시절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울산에 살고 있었어.

하루는 인터넷에서 뉴스에선 보여주지도 않았던 (감추고 숨겼던) 끔찍하고 화가 치미는 사진들을 마주하게 되었어.

촛불 집회 중이던 시민들을 정부가 강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찍힌 사진들이었어.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수없이 많은 영상들과 사진들을 보게 되었어.

그리고 나는 지금 교실에서 태평하게 공부나 하고 있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던 것 같아.

그냥 합리성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었고 감정이었어.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서울에 가야겠다 생각했어. 나도 그들의 옆에 있어야만 했어.

그래서 다짜고짜 교감 선생님을 찾아갔어.

서울에 가야겠다고. 촛불집회에 참가해야만 한다고. 그러니 학교를 좀 빠져야겠다고.

친구들에게도, 엄마 아빠에게도, 담임 선생님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교감 선생님께는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이런 나를 이해해주실 거 같았어.

당시 교감 선생님이랑 좀 많이 친했나? 지금의 나로선 잘 이해되지 않지만 ㅎㅎ

아이들이 어른을 믿을 땐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니까. 교감 쌤이 나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줬겠지?

당연히 교감 선생님은 나를 달랬고, 서울에 가지 않고 지금 내 자리에서 내 마음을 표할 방법을 알려주셨지만.

그 시절 꽤 오랫동안 많이 울었던 것 같아. 답답함과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에 현장 사진을 보며 미안하단 말과 함께 많이 울었어.

그들에게 엄청난 부채감이 느껴졌어.


그게 시작이었을까?

이후 어른이 되었고, 서울에 살게 되어 물리적인 조건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졌음에도.

하나하나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건들과 문제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자꾸만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던 고등학생의 나로 돌아갔어.

시위에 참석하고, 후원을 하고, 단체에 가입해서 미미한 활동도 하고, 관련 내용들을 공부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내 생각을 소리치고.

나름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도.

무슨 일을 해도 자꾸만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어' 란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던 거 같아.

어딘가 더 가야만 할 것 같고, 무언가 더 해야만 할 것 같았어.


어느 해 광화문 광장에 앉아 나는 이런 마음을 품었어.

지금의 내가 가장 약한 나일 것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힘이 생길 것이다.
조금씩 더 현명해질 테니, 나중엔 조금 더 힘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매주 이곳에 나와
촛불을 들고 수많은 촛불들에 의지해 소리치고 눈물만 흘리진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잘 못 되었단 생각이 들면 무엇이 잘 못 되었으며, 그걸 바로잡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행동에 옮길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무력감이 살면서 내가 느낄 최대의 무력감일 것이라고.
조금 버텨보자고 나는 자랄 거다. 자라고 말 거다.

그런데 말이야. 죄다 틀린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수많은 일 앞에서 죄책감이 들고 다 내 탓 같아.

게다가 내겐 이제 내가 자랄 것이란 희망도 희미해졌어.


지난 주말 오랜 친구들을 만났어.

친구들과 이런저런 일상들을 나누다 보니

영어학원에서 만나는 중학교 꼬맹이들 이야기도 하게 되었어.

한참 내 얘길 듣던 친구가 따뜻하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재하야 그치만, 너무 큰 책임감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애들이 좋은 방향으로 가지 못 한다고 해서 그게 네 탓은 아니잖아." 란 말을 했어.


나는 꽤 많은 곳에서 내가 뭔갈 할 수 있을 거란 용기를 품나 봐.

그런데 용기가 지나쳐 착각이 되기도 하고, 오만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이런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걸까?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이야기를 보내려 했던 것은 아닌데.

쓰다 보니 매캐한 내용이 가득한 답답한 메일을 보내게 된 거 같네.


이상한 걸 너무 알지만,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이상함을 날려 보내며,


오늘도 무한한 사랑으로, 재하가.

2022. 11. 11. 오후 8:34




Re: 설령 감정의 카운터 펀치를 맞더라도

재하 안녕?


지금쯤 다시 춘천의 생활로 돌아갔을까?

또 아프기 위해, 

화장실을 가는 것처럼 당연하게 운동을 하러 갔을까?

나는 재하를 만난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 것 같다.

한 시가 넘어 잠에서 깨어나고 

세 시에 첫 끼를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에

닳도록 봤던 드라마를 보느라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이제야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켰다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져서 편지를 보내기로 해.


지난주에 나는 술을 참 많이 마셨어.

수요일에는 와인을 세 잔 정도 마셨고

목요일에는 밤을 새워서 와인 세 병을 비웠고

(물론 친구와)

숙취로 금요일을 보낸 뒤에는

언니랑 다시 오랜 시간을 걸쳐 정종이니 사케니 하는 것을 잔뜩 마셨잖아.

문득 내 간과 쓸개와 위와 장이 걱정되다가......,

진짜 걱정해야 되는 건 내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럴 때가 있잖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을 때가 있고.

준비하던 것들에서 다 미끄러지고 난 지금 

아무래도 나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나 봐.

좋아하는 친구들을 한 주에 한 명씩 만나다 보면

올해가 끝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 볼까? 싶어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다시 그만둬.

어제는 괜히 빨래를 한답시고 

새로 산 지갑을 세탁기에 돌렸지.

그러고도 오늘 또 이불을 빨았어.

사는 일은 그저, 

아주 오래오래 옷을 빠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머리카락을 줍고 바닥을 닦고 마른 옷을 개고

화장실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을 빼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니까 나한테 요즘 인생이라는 건 그냥 매일매일을 버티는 일 같아.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누군가를 구하고 싶은 언니의 마음이 죄책감으로 가득한 건 당연한 일 아닐까?

난 사실 무서워.

뉴스에서 가슴 아픈 일이 끊임없이 재생되는데

사람들이 화를 내고 울고 큰소리로 무언가를 외치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고장 난 사람처럼 그런 일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


상대와 손가락 하나를 맞댄 채

눈을 감은 채 나와 그의 손가락을 한꺼번에 만지면

내 피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 알아?

슬프고 싶지 않아서

무력하고 싶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나는 느끼기를 포기한 사람 같아.

아마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언니 같은 사람이 너무 많은 죄책감과 책임감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가만히 천장의 무늬를 더듬어 본다.


옛사람들의 어떤 말은 가만 들어보면 틀린 게 없지.

감정은 당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동시에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

슬프고 싶어서 슬프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괴롭고 싶어서 괴로운 사람은 없을 거야.

설령 그것을 원했다 하더라도 원하는 때에 알맞은 감정이 닥치지 않잖아.

감정당하지 않기 위해 느끼지 않는 사람과

당할 줄 알면서도 무거운 마음을 가지는 사람.

세상엔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있다.

아니, 사람은 애초에 그만큼 입체적이잖아.


다시 생각해 보자.

정말 감정이 당하는 게 맞을까?

모른 척하려고 하면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어.

언니는 후자인 거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무언가를 하는 그 선의,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라도 하는 그 다정함이

언니는 모르는 무언가를 구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때로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자존감이나

모르는 이의 2시간이나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정말 무서운 건 때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만함이라고 여기는 섬세함이

언니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언니가 당하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당히 걸어 나와

언니가 구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구하려고 해 봐.

아마 잘 안 될 거야.

그래도 계속해.

내가 아는 민재하는 할 수 없을 걸 알면서도 해 보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해내는 것들도 생길 거야.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지낸 10년 동안 그랬잖아.

언니는 아무래도 사람을 사랑하고

그만큼 미워하고

그만큼 아끼고

그만큼 괴로워하고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 같아.

그 맷집을 누가 어떻게 막아?

아무도 못 막아. (ㅋㅋ)


언니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 같은 건 역시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죄책감과 그 책임감이 언니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

누군가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무언가를 바꾸려고 애쓰는 언니를 보는 게

나로서는 감사하고 귀하고 그래.

그러니까 답을 찾게 되거든 내게도 알려 줘.


또다시 비가 오는 날,

작은 우산을 함께 쓰고

바지가 잔뜩 젖어도 깔깔 웃으며 밤거리를 걷자.

적어도 그런 기억이 모여 

어떤 날의 우리를 구했을 거라고 믿어.


재하가 이상한 사람이라 참 좋다.

오늘은 그런 생각을 보내.


사랑을 담아,

비누

2022. 11. 14. 오후 7:14



Re: 너 뭐 돼? 우리는 모이면 뭐든 돼

안녕 재하야

메일을 읽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헤아리다가

아득해지는 기분만 반복이 되더라고.

그래서 일단 답장해보기로 했어.


음. 일단 나는 감정이라는 건

내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감정이 있고

내 밖에서 억누르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

재하의 요즘 감정은 후자인 거 같네-


난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늘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편이야.

감동이나 사랑도, 슬픔이나 외로움도.


그런데 난 이상하게도 말이야-

밖에서 타인이나 사건으로 짓누르는 감정은

어렵긴 해도 방법을 찾아서 마주하고 이겨내려는 편이야.


언젠가 재하한테 카톡으로 이야기한 적 있는 거 같아.

사회가 혼란해서 분노와 상실감이 나를 짓누를 때는

그 혼란한 사회와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는 곳을 찾아.


(일찌감치 하나의 사람은 약하다는 인정이 우선 필요하겠지?)


그리고 힘을 보태는 편이야.

같이 소리치거나, 후원금을 내는 방식으로.


이 방법이 매일 무게를 들어 올리고 성취감을 쌓는 재하에겐

좀 답답할 수도 있어. 당장 결과가 잘 보이지 않아서-


하지만 혼란의 틈에서

빛을 내고, 조금씩 무언가 이루어가는 걸 보면

나아지고 있다. 조금씩 이루고 있다. 는 희망이 보여.


난 그 희망의 끈을 쥐고, 한 걸음씩 삶을 나아가는 거 같아.


이번엔 너는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건 부정함이 힘을 가진 사회지.


재하야,

하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도 돼.

그건 나약한 게 아니라 더 강한 함께를 만드는 거야.


유나

2022. 11. 19. 오후 12:59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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