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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아들 May 10. 2017

돌아서라도 가야 하는 길

엄마가 가고 있는 길

내가 어릴 적 아파트에 베란다가 있었는데 그곳에 테이블을 놓고 내 또래 친구들과 미술수업을 받았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리고 노는 게 좋아서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형이 자신의 꿈이 자랑하고 싶었는지 나에게 와서 말했다.

"난 커서 과학자가 될 거다. 넌 뭐가 될 거야?"

난 아무런 생각 없이 대답했다. "미술 선생님" 

그러자 형이 내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엄마처럼 돈 하나도 안 벌려 그러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형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어쩌면 저렇게 경제관념이 뚜렷했을까.

게다가 90년대 초반인데 엄마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서구적인 개념은 어디서 얻었을까. 

역시 형은 대단하다.


당시 엄마가 우리를 키우던 시절을 회상하며 쓰던 글의 일부를 옮긴다. 



www.eunsooklee.org

전시를 하기 위해서 다른 작가의 전시회를 찾아다녔는데, 특히 나의 전공분야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둘째가 유치원을 가면 개인 시간이 났지만 12시에 돌아오기 때문에 전시 관람을 하기 빠듯한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화랑이 10시 오픈이지만 왜 그리도 제시간에 열지 않았는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문 열기를 기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대부분 오전에는 관람자가 없어 12시 전에 전시 관람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과천대공원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자가용이 없던 나에게 오전에 관람하고 돌아오기는 불가능한 곳이었다. 전철로 과천에 일직 도착하더라도 결국 코끼리열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보기만해도 느린 코끼리 열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를 포함한 큰 전시 작은 전시 할 것 없이 수많은 작가의 전시를 관람했다. 작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선생님을 알게 됐고 오랜 친구가 되어 만나던 중 자기가 유학 가기 전에 전시한 작품을 보여 주는데 순간 깜짝 놀랐다. 약 15년 전 내가 가본 전시의 작품 이였던 것이다


70년대 말과 80년대에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많은 작가들이 국내로 돌아오면서 한국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외국문화를 쉽게 접할 기회가 없었던 때라 이들이 보여 주는 전시는 새롭게 보였다. 나에게도 역시 신선한 충격으로 어떤 작가가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들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작가로 교수로 한국에 자리를 잡았다.


남들이 자리 잡을때 엄마는 홀로 의자를 올려다 보고만 있지 않았을까


반면 나는 다달이 받아쓰는 생활비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을 한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활비가 모자라다고 손을 내미는 건 주부인 나로서 허락할 수 없었다. 많건 적건 상황에 맞춰 살림을 해야 했다. 아이가 100원짜리 아이스케키를 먹고 또 사달라고 하면 왜 또 먹냐며 사달라고 조르는 큰아이를 때려주었다. 참 모진 엄마다. 월말이 되면 동전 한 두 푼이 얼마나 아쉬운지.


형이랑 나를 참 거지 같이도 입혀놨다. 특히 형옷은 왜 저럴까. 형이 엄마를 싫어할만하다


보고 싶은 전시가 있었는데 미루다 보니 마지막 날이 되었다. 월말이라 남은 돈이 500원짜리 동전 하나였다.

왕복 버스비를 제하면 200원 정도가 남을 것이라 예상하고 서둘러 전시장을 향했다. 

엄마의 글과 달리 토큰을 이용했을것으로 추정


전시장에 도착하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뿔싸.. 전시 입장료가 1000원이라니..


국립미술관만 입장료가 있는 줄 알았던 나의 실수다. 누가 내 심정을 알겠는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순간 전시장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광화문에 아는 선생님이 사시는게 생각이 났고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비록 선생님은 안 계셨지만 마침 선생님 어머니가 계셨다. 황당해하시던 선생님의 어머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1,000원을 빌렸고 전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왕복 4 정거장을 단숨에 완주했다. 이후 1,000원을 갚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원이 아쉬울 때면 첫째가 둘째에게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전시가 끝나고 작품이 집으로 돌아오면 돌아온 작품을 가르치며 하던 말이다. 

요건 5천원, 저건 3천원, 요건 천원 하면 다 팔렸을 텐데 엄마 비싸게 해서
하나도 안팔렸어! 이제 우린 망했다 :/ 


큰애는 현실적이었다. 둘째가 유치원 다닐 때 동생에게 묻기를 "난 이다음에 과학자가 될 건데  넌 뭐가 될 꺼냐?"하는 것이다. 둘째는 미처 장래에 대해 생각해 놓은 게 없었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난 엄마같이 미술 선생님!"이라고 하자 "야, 이 세끼야! 엄마같이 미술 선생님 하면 돈도 하나도 못 벌어"하더니 동생을 마구 때리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울면서 형한테 하는 얘기가 "그러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왕창 벌면 되잖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얘기가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아직까지는 첫 째의 말이 맞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시련이었던 화상의 상처를 딛고 첫 개인전을 오픈하고 지도 교수였던 스승을 찾아갔었다.

"은숙아. 개인전을 왜 하냐?
개인전 한다고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니 애들이 니 최고의 작품이니 애들이나 잘 봐라"

'그 힘든 상황에서도 전시를 한다니 기특하다. 잘 해라'라는 위로를 받기 위해 찾아간 스승에게서 충격을 받은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나도 모르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스승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15년 20년이 흐르면서 불행하게도 뼈저리게 이해가 되었다.  

그야말로 힘든 여정의 길이다. 누가 시킨다고 가는 길이 아닌 것이다.  누가 말린다고 관두는 것도 아닌 것이다. 돈이 돼서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좋아서, 그것도 미치도록, 죽도록 미쳐야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미치되 재미가 있어야 계속 가는 것이다.


<엄마의 글을 읽다 보니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얼마 전 그 스승을 아주 오래간만에 다시 찾아뵈었다. 개인전을 왜 하냐고 하시더니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래 세계적인 작가로 나가거라"하시며 "남들이 가는 길을 너는 돌아서 왔지"하신다.   

과연 내가 먼길로 돌아왔던 걸까?

그렇게 돌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었던 게 아녔을까.


100세 인생이다. 

앞으로 남은 나의 작가인생에서 돌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더 멀리 갈 수 있지 않을까.


돌더라도 가야하는 길



작가아들이 바라보는 설치미술작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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