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있는 피해자의 등장
본 후기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1. 소재와 돌파구
위안부를 다룬 영화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중심이었던 위안부 관련 영화는, 스토리 중심적인 영화로 넘어왔다. 스토리 영화지만 픽션도, 논 픽션도 아닌 그 경계에 위안부라는 소재는 어느 소재보다 뜨거운 소재로 자리매김 했다. 강제징용 만큼이나 예민하고 피해자 증언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짜야하기 때문에, 스토리로 다루기에는 버거운 감이 사실 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아이캔스피크>는 장르적 특성을 통해 이에 대한 돌파구를 찾는다. 휴먼 코메디, 중간중간 터져나오는 포인트들은 예측이 불가하고 일상적이다. 방금전까지 배꼽잡고 웃다가 “우리 방금 왜 웃었지?”하고 돌아보면서 또 웃게 되는, 그런 웃음 포인트들을 보유한다. 그렇기에 의도적인 코메디 모먼트를 찾아 헤멘 관람객들은 “별로 재미없었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이캔스피크>는 결국 우리 모두 같은 세상에서, 별 것 아닌 일들로 웃고 사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2. 피해자 또한 사람이다
주로 이제까지의 위안부 관련한 영화, 혹은 성폭력에 의한 희생자를 다루는 영화들의 포인트는 피해사실과 그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에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피해 과정을 상세히 다루는 과정에서의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연출이나, 관람 이후 해당 영화의 특정 시간대를 의도적으로 운운하는 저급한 영화평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봤을 때, 해당 영화가 결국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던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요 근래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이렇게 말하면 “감동에 차서,(혹은 국내 영화 코드에 감명에 받아) 호평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이 소재가 단순히 감동코드를 노리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기존의 한국 영화가 이러저러한 재미를 추구하다가 감동코드를 향해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면, 이 영화는 결말 자체가 정해져있었고, 재미는 부가사항으로 들어온 영화이니까.
3. 여성과, 여성
위안부는 전쟁 범죄이자 성 범죄였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기존의 가부장제적 사고 아래, 가문의 수치가 되거나 피해 사실을 숨겨가며 홀로 살 게 되었다. 극 중 옥분 또한 그래왔다. 누구보다 굳세게, 단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혼자.
옥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오직 같이 일을 경험하거나 그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여성 앞에서이다. 정심은 그녀에게 같은 생존자, 함께 “살아남을” 이유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옥분이 울 수 있는 대상은 몇십년간 생고락을 함께한 진주댁 앞에서였다. 진주댁은 아무도 그녀를 보며 대신 울어주지 않았던 옥분의 과거의 몫까지 옥분을 위해 울어준다.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오직 그 둘이 일생의 대부분을 함께한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그녀는 마지막으로, 같은 경험을 함께한 다른 생존자 미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미셸이 그러했듯이.
“아이캔스피크”라고 말하는 옥분은 어디서도 당당하다. 모든 사람이, 모든 범죄자가 아닌 사람들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