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열의 일상다반사-처(處)한 환경에 따라 부르는 노래도 달라진다
내가 어렸을 때 일이다. 마을 잔칫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을 치며 동네 골목을 돌며 두레(풍물)놀이를 했다. 놀이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한 자리에 어울려 음식을 나눠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며 흥겹게 놀았다.
아버지는 그런 때는 물론 힘들거나 울적할 때도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로 시작하는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곤 했다. 그뿐 아니다. 평상시에도 아버지는 종종 이 노래를 혼자 흥얼거렸다. 이런 영향 탓인지 모른다. 악보나 가사도 없이 그저 자주 듣고 가끔씩 따라 부르다 보니 아버지의 애창곡, “꿈에 본 내 고향”이 내가 배운 첫 유행가가 되었다. 자녀에게 미치는 부모의 영향이 큼을 알 수 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아버지가 이 노래를 워낙 즐겨 부르기에 나는 여러 번 그 이유를 물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22살의 나이에 의용군(義勇軍)으로 끌려가 사랑하는 가족 특히 3살배기 너와 네 어머니가 그리웠지만 만날 수 없는 신세가 처량하여 부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처한 환경에 따라 즐겨 부르는 노래마저도 바꾼 것이다.
사연을 좀 더 이야기하면 이렇다. 아버지는 1950년6월25일에 6.25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되는 7월18일에 의용군으로 붙들려가 전쟁에 참여했다. 북한의 흥남까지 올라갔다가 1.4후퇴하다 붙잡혀서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952년 5월(음, 윤달)에 석방되어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53년04월21일자로 다시 군에 징집(徵集)되어 군생활을 하였다. 군번은 9431161, 병과는 912다. 1957년10월10일 육군 중사로 전역을 했다.
어린 시절은 물론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버지는 나에게는 하나님 같았다. 논479평의 농사를 지으며 온갖 막노동을 하여 나를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졸업을 시켰고, 대학합격을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동생1명을 뺀 5남매 모두를 대학졸업까지 시켰기 때문이다. 기적을 일으킨 셈이다.
그런 아버지는 내 곁에 안 계신지가 32년이 더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립고 보고 싶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의 애창곡 “꿈에 본 내 고향”을 속으로 불러본다. 그러다 보면 마음으로나마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 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려고 다짐한다.
필자 주
1. 아버지는 유전(劉筌)의 28세손으로 유병희(劉秉喜)다. 1928.03.10(양 1928.04.30)에 태어나 1993.05.09일 세상을 떠났다. 6.25참전 국가유공자다.
2. “꿈에 본 내 고향” 노래는 김기태 작사, 박두환 작곡, 한정무 노래로 6.25전쟁 중 1.4후퇴 때 실향민들은 물론 국민들의 망향가(望鄕歌)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