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를 방불케 할 때 극사실주의라고 한다. 추상이 아닌 웬만한 구상은 사실주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극사실주의는 극단의 재현인 셈이다. 사실, 미술사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았다. “예술의 아주 소박한 시녀”라고 사진을 폄하했던 샤를 보들레르는 같은 맥락에서 상상력이 결핍된 사실주의를 혹평하기도 했다. 기술과 달리 예술이라면 모름지기 손재주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추상이 지루해진 1960년대 후반 다시 사실주의가 고개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와 다른 사실이라고 해 신사실로도 불리고, 극사실로도 불렸지만 박한 평가는 여전했다. 너무 투명한 게 문제였다. 뭘 그렸는지 훤히 보이니 예술성 운운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사진 같은’ 극사실주의는 사진과의 차별화가 필요했다. 유행이 돌고 도는 미술계에서 극사실주의의 예술성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잘 그리는 화가로 불릴 것이냐, 창작자인 작가로 불릴 것이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극사실주의 작가 윤위동도 오랜 방황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Monologue 100, 162x130cm, Acrylic on canvas, 2019
Q. 극사실주의 화법을 고수하는 데 어려움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한동안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렸죠. 지독한 가난과 그보다 더 처절한 자기 불신의 시간이 길어졌어요.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공부했습니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선배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알게 됐죠. 아,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구나. 작품 철학의 문제구나, 하고 말이에요.
Q. 돌을 모티프로 그리게 된 전환의 계기와 관계가 있을까요?
: 나 스스로를 회의하는 시간을 견뎌내면서 돌을 비로소 바라보게 됐어요. 작은 돌멩이 하나가 견뎌낸 자연의 시간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모래나 흙이 뭉쳐 열과 압력을 견뎌내 돌이 되죠. 그중 일부는 인고의 시간을 더 거쳐 보석광물이 되기도 하고요. 대개의 돌은 풍파 속에서 동글게 깎이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요. 돌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는 셈이에요. 나를 견뎌내며 그런 자연의 이치를 직시할 수 있게 됐어요.
Monologue 244, 116.8x91cm, Acrylic, sand and resin on canvas, 2021
Q. 단지 재현의 문제가 아닌, 철학의 문제라는 나름의 답을 찾은 거군요.
: 2차원 평면에 어떤 대상을 3차원처럼 옮겨 그리는 재현 기술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닌 거죠. 돌을 통해 비로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제목도 monologue, 독백입니다. 흙이 돌이 되고 돌이 흙으로 돌아가는 암석윤회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거죠. 우리도 결국 자연의 일부라는 순환에 대한 제 나름의 철학을 돌에 투영하고 있습니다.
Q. 유튜브 영상을 통해 작업하는 과정을 보았는데, 시간성이 느껴졌습니다.
: 흔히 제 작품을 보고 “사진 같다”고 하는데, 그런 기계적 작업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극사실성을 구현하는 작업 자체가 반복적인 손의 노동, 축적된 시간을 요하니까요. 붓질을 반복하는 시간이 쌓여야 오랜 시간 마모돼 매끈한 표면을 갖게 된 돌멩이의 질감을 화면에 담을 수 있지요. 물론 돌의 시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요. 자연의 이치를 담는 작업이라 봐주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