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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승 May 17. 2020

4. 회화의 순수한 변신

현대미술은 어렵다?

"무엇이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가.”

                                                                                                            

지난 4월 아트딜라이트갤러리에서 개인전 <어둡고 빛나는 순간 Shine in the Dark>을 열며 작가는 묻고 있었다. 이 한 줄 때문이었다. 다소 심드렁했던 나는 작가가 SNS에 올린 이 한 줄 물음에 전시 마지막 날인 30일 부랴부랴 개관시간에 맞춰 그의 전시를 찾았다. 작가 정직성은 사진과 영상 매체가 대세가 된 지 오래인 현장에서 끈질기게 회화에 매달리며 그것도 추상 작업을 해왔다. 이번 개인전은 그 궤도를 이탈한 듯한 나전칠기 작업, 그러니까 공예였다.

순수예술은 ‘순수’와 ‘예술’ 각 단어가 주는 완고함만큼이나 장벽이 높다. 내부 질서가 공고하다는 의미다. 순수예술에서 가장 ‘순수’하다고 평가되는 회화 매체 안에서도 장르별 위계가 존재한다. 더 이상 통용되지 않지만, 역사화가 피라미드 최상위에 위치하고, 인물화-정물화-풍경화로 서열이 매겨지던 때도 있었다. 통용되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얼마나 회화 매체적인가로 그 위계가 결정된다. 제도권 내 질서가 이럴진대, 공예는 더욱이 예술 아닌 기술의 범주로 그간 미술사에서는 논외 영역이었다.


 정직성의 이번 작업에 심드렁했던 이유 하나는 이렇듯 순수예술을 벗어난 공예로의 선회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 출신 작가들이 당위인지 소명인지 좇고야 마는 ‘한국적 미감’과 결국은 한복, 한옥, 오방색 등 ‘한국적 소재’로 귀결되는 그 종착점이 회의적인 탓이었다. 그런데 나전칠기라는 공예에 한국적 소재주의를 택한 작가가 도발적으로 묻고 있었다. 무엇이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가. 회화의 정체성에 정면도전하는 물음이었다.           

모더니즘 미술사를 미국 중심으로 새로 쓴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예술을 순수하게끔 하는 질적 기준을 ‘자기규정’ 혹은 ‘자기비판’이라고 역설했다. 순수한 회화가 회화이기 위해서는 회화다워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는 회화가 스스로 자기비판을 해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매체 요소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회화 요소는 캔버스의 형태, 물감의 속성 그리고 평평한 표면이다.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물감은 여러 안료 중 하나일 뿐이다. 캔버스의 형태 또한 조정될 수 있다. 그런데 평평한 표면만은 환원에 환원을 거듭해도 부정할 수 없다.

 ‘평면성만이 회화예술에서 특유하게 독자적인 것이다.’ 그린버그가 1965년의 글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에서 천명한 바는 지난 세월 내내 반모더니즘 기치 하의 여러 운동들 속에서도 난공불락이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먹으니 배부르다’처럼 당연한 회화의 평면성은 미술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간단치가 않은 문제다. 앞서의 글에서 설명했듯 회화는 재현에서 시작됐다. 캔버스 이전 평평한 벽면에 달리는 들소를 그리던 시대에도 그린다는 건 얼마나 실물과 닮았는가가 관건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실물을 담아내, 진짜 실재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의 문제였다.  

근대를 지나 개인 주체로서 각성하게 된 작가들은 더 이상 세계의 모방자가 되길 거부했다. 1830년대 말 발명된 사진은 작가의식을 제대로 자극했다. 사진만큼 재현할 수 없는 이상 사진이 할 수 없는 ‘예술’을 해야 했다. 회화가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작가 주체의 주관적 감각에 충실하겠다는, 더 이상 '있는 대로'가 아닌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겠다는 다른 의미의 사실주의가 시작됐다. 그 시작점을 우리는 인상주의라 부른다.                                                                                     

Édouard Manet, Música en las Tullerías, 1862

회화의 자기반성은 매체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네모난 캔버스의 물리적 크기와 그 평면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네(Edouard Manet, 1832-1883)가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는 회화의 매체 한계를 대놓고 작품에 구현했기 때문이다. 기피되던 검정색이 마네의 화면에서 유독 많이 쓰인 이유는 입체감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입체 표현만 거부한 게 아니라 캔버스의 환영적 공간감도 거부했다. 캔버스는 캔버스일 뿐, 공간은 확장되지 않는다. 마네는 그래서 여 보란 듯 비례를 무시하고 인물들을 캔버스 크기에 맞춰 구겨 넣거나 잘라버렸다. 붓칠을 붓칠로 보이게 그 흔적을 그대로 표현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러니 붓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매끈하고 볼륨감 넘치는 작품에 익숙하던 당대의 미술 전통에서 인상주의는 용인되기 어려운 파격 그 자체였다.

Claude Monet, Poplars at Giverny, 1887

당대의 파격이 현대에는 전통이 됐다. 작가 주체성이 발현된 붓터치와 시각의 상대성, 그로 인해 발현된 예술적 아우라와 극적인 평면성까지, 인상주의는 모더니즘이 정의하는 회화의 전형이 된 지 오래다. 정직성의 개인전으로 시작된 이 글에서 모더니즘의 시작점인 인상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 연유는 자개를 붙이고 옻칠한 작가의 화면에서 인상주의 화면을 봤기 때문이다.                                                                                                     

“회화네요.”
반신반의하며 작품 앞으로 달려간 나는 작가 앞에서 인정하고야 말았다.
“저는 회화라고 생각하면서 작업했어요.”
작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옷칠은 더할 수 없이 평면적이었고, 작가가 한 조각 한 조각 붙인 조개패는 모네의 짧은 붓터치를 닮아 있었다. 회화 아닌 다른 경우는 생각할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게다가 자개 조각조각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빛의 색을 붓질 하나하나에 투영한 인상주의 화화와 꼭 닮은꼴이었다. "어, 인상주의 풍경인데..." 아니나 다를까. "인상주의 회화를 염두에 둔 작품이에요." 작가는 또 덤덤하게 말했다.

작가는 붓질을 하듯 나전을 붙였다고 했다. 잠시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백골이라 불리는 소나무판을 짜 생칠을 하고 갈고 닦기를 여러 번, 토분을 입히고 삼베를 얹어 또 갈고 닦기를 여러 번, 드디어 옻칠을 올리고 또 올려 매끈해진 화면에 스케치를 하고 나전을 붙인다. 전복이나 조개, 소라 껍데기를 얇게 져며 만든 나전을 잘게 깨뜨려 그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모두 수작업으로 붙인다. 나전을 붙인 위에 다시 옻칠을 하고 닦기를 또 여러 번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글로 옮기기도 숨찰 만큼 노동집약적이다. 정직성의 나전 작품은 이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칠기를 만드는 작업은 공방에서 맡고, 작가는 전체적인 작품 구상과 함께 나전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작가가 붓질에 비유한 나전 조각은 실제 인상주의 화폭의 붓자국을 닮았다. 인상주의 회화를 코 앞에서 보면 보이는 건 물감 자국들뿐이다. 무엇을 그린 건지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정직성의 나전 화면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보면 나전 조각들에 불과하다. 걸음을 몇 발짝 뒤로 옮겨야 비로소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모네가 지베르니 정원에서 포플러 나무가 아닌 그 인상을 화폭에 옮겼듯, 정직성 역시 그가 본 풍경의 인상을 나전으로 옮긴 셈이다. 작가는 "누군가는 파도로 누군가는 바람으로 볼 수 있으니 '추상적'"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화면은 형태가 분명하고 은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구상이고, 그 내용은 인상이다.        

구상이냐 추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사가 입장에서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나전칠기의 전통기법을 그대로 옮긴 작업은 공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회화적이다. 회화의 매체적 요소는 물론 작가의 손이 개입된 아우라마저 강력하다. 작가의 손뿐인가. 수많은 전문가의 노동이 소요됐다. 순수예술을 하는 작가의 노동집약적 작품이 회화로서 제시됐고, 이제 작품은 미술사 안에서 명명돼야 한다. 그런데 어렵다. 매체 경계를 확실히 하는, 그래서 예술과 삶과의 경계마저 구분짓는 모더니즘 영역에서 순수회화와 공예 사이의 경계 흐리기를 인정할 수 있을까. 공예의 변신일까, 순수 회화의 변신일까. 어렵지만 흥미로운 숙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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