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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승 Apr 17. 2020

3. 못 먹을 도넛의 스펙터클

현대미술은 어렵다?

빌딩 숲에 산다. 높고 화려하지만 작은 육신 하나 편히 뉘일 데가 없다. 설정부터 짠한 도시의 벌레 라바Larva 이야기다. 애벌레로 살다 번데기를 거쳐 날개 단 나비가 돼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산전수전 겪으며 두 날개를 잃고 그야말로 맨몸뚱이로 뉴욕 거리에 떨어졌다.

애니메이션 <라바 인 뉴욕>에서 애벌레 아니, 날개 없는 성충 빨강이와 노랑이는 하수구와 쓰레기통을 전전하며 도시쥐와 도시새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데, 어느 날 분수대 위에 떨어진 도넛 하나를 발견한다. 보기에도 탐나는 예쁜 자태의 도넛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빨강이와 노랑이는 도넛을 먹었을까.

빨강이와 노랑이가 탐하던 도넛이 가득한 곳이 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학고재 본관에 들어서면, 라바를 닮은 달팽이 한 마리가 도넛을 입에 물고 손님을 맞는다. 입구서부터 휘황찬란한 도넛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상을 차린 이는 ‘도넛 작가’라 불리는 김재용Jae Yong Kim이다. 작가는 2012년부터 도넛을 굽기 시작했다. 지난 8년간 구운 도넛 1500여 개가 한 데 모였다. 설탕물을 가득 머금어 윤기 흐르는 먹음직한 도넛처럼, 김재용의 도넛도 반짝거린다.

파노라마처럼 전시장 사면을 가득 채운 <도넛 매드니스!!>를 바라본다. Glittering, Sparkling, Twinkling 세상 모든 반짝이는 수식을 갖다 붙여도 모자랄 화려함을 자랑하는 1200여 개의 도넛에 시선을 빼앗긴다. 내 응시의 이유는 단 하나, 도넛이 예뻐서다. 도넛이 제아무리 먹음직스럽다한들 이토록 눈길을 사로잡을까. 인간이 욕망하는 도넛의 본질은 먹어서 맛을 취함인데, 내 눈앞의 도넛은 먹을 수 없다. 맛볼 수 없는 도넛이 내 앞에 현존하니 시선이 쏠릴 수밖에.  

김재용, 도넛 매드니스!!, 2012-2020

먹을 수 없는 도넛은 도넛일까? 분명한 건 작가 김재용의 도넛은 김재용의 오브제다. 오브제는 태생적으로 작가가 표상하고자 한 관념의 응고물이다. 작가가 그리고자 한, 말하고자 한 세계의 상(像), 허상이라는 얘기다. 작가는 자신의 상을 대상화한 실체로서의 오브제를 만들어 자기동일적 세계를 꿈꾼다. 작가는 그의 도넛 하나하나를 “매일 일기를 써 내려가듯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작가의 지난 8년여간의 기록인 셈이다.

작가의 작업실은 흡사 제빵실 같다. 흙으로 도넛을 빚고 구워 그 위에 유약으로 색을 내고 광을 낸 뒤 광채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뿌린다. 도넛과 도자, 크리스털과 유약, 그가 차용한 소재와 기법에서 문화와 문화가 충돌한다. <발이 묶인 청화 유니콘>(2019)에서는 서구 중세문학에 등장하던 신성의 동물 유니콘을 청화 기법으로 채색했다. 노골적인 문화 충돌이다. 작품 <동양과 서양에서 자랐거든>(2018)에서는 아예 해외에서 자란 작가의 자전적 이력을 공개했다. 그의 도넛 시리즈에 담긴 문화 혼종의 당위를 말한 셈이다.

김재용, 발이 묶인 청화 유니콘, 2019

한국 출신의 작가 이우환은 오브제를 가리켜 “근대 부르주아 가치관이 만들어낸 표상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세계를 뜻한 바대로 대상화해 조작할 수 있다는 근대 인간의 오만의 그림자라는 얘기고, 거울에 비친 얼굴 같은 진짜 아닌 허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간이 만든 허상이 반란을 꾀한다. 허상이 허상을 낳고, 그 허상이 허상을 낳아 자기복제로 증식하더니 스스로 질적 변화를 일으켜 탈허상화 현상을 유발한다. 그러니까 내 이미지가 나를 대체하곤 나를 잠식해 나를 넘어서버리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내 실물보다 기계로 만진 내 사진 이미지가 더 나답지 않은가.

김재용, 동양과 서양에서 자랐거든, 2018

사진은 기술이 예술을 대체해 버린 예이기도 하다. 사진 매체는 거울 이미지, 즉 허상을 끊임없이 복제한다. 첫 번째 출력 사진과 백 번째 출력 사진 사이의 위계는 없다. 원본이 없다는 얘기다. 원본 없는 복제, 시뮬라크르라 한다. 먹을 수 없는 도넛도 시뮬라크르다. <도넛 매드니스!!>의 저 셀 수 없는 도넛 행렬에서 1열 1행 도넛을 7열 7행 도넛으로 바꿔 끼운 들 그 차이는 무의미하다. 맛을 본질로 하는 도넛을 복제한 도넛의 자기 증식은 예술이 됐다.

시뮬라크르의 자기 증식은 대량 생산을 미덕으로 하는 대량 소비 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시대는 풍요로웠으나 개인은 궁핍했던 전후 재건 직후의 서구에서 팝아트 작가들은 일찍이 허상의 무한 증식을 증언했다. “나는 물체를 증오한다”고 외쳤던 앤디 워홀Andy Warhol은 1962년 캠벨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유리병의 이미지, 정확히는 광고 컷을 무한 증식시켜 허상의 자기완결성을 보여준 바 있다. 허상의 폭로였고, 컨베이어 벨트 위 대량 생산된 수프 깡통과 유리병의 현실 반영이었다.

Roy Lichtenstein, Popeye, 1961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실재와 허상을 구별할 수 있을까.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팝아트가 만화와 광고 같은 상업 디자인을 순수미술에 본격 끌어들인 건 예술과 비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지우기 위함이었다. 예컨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만화 뽀빠이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손수 스케치를 하고 이 스케치를 기계로 캔버스에 전사해 그 위에 벤데이 점 같은 만화 기법을 그대로 살려 손수 채색했다. 기계 복제 위에 굳이 수작업을 반복해 인간의 창조 행위와 기계의 복제를 구분할 수 없게 해 버린 작업이었다.

Claes Oldenburg, Floor-Burger, 1963

순수 예술에 싸구려라 불리는 온갖 잡다한 소비재와 대중문화를 끌어들인 작업에 엘리트들은 당황했다. 캠벨 수프 깡통은 보잘것없고, 만화 컷은 가볍기 그지없지만, 순수 미술가의 손을 거친 탓에 고상한 예술품과의 경계 짓기가 곤란해진 까닭이었다. 클랜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역시 그의 복제물들이 예술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리라 기대했고, <바닥-버거 Floor-Burger> 같은 바닥에 누운 거대한 크기의 못 먹을 오브제를 만들었다.

기와로 지붕을 올린 학고재 갤러리에서 만나는 도넛은 공교롭게도 이질적이다. 소시지, 햄버거, 아이스크림 콘처럼 대량 소비되는 식품군이자 서구 문명의 상징을 차용한 김재용의 팝아트는 올덴버그의 햄버거가 그랬듯 의도적이다. <아주 아주 큰 크롬 별 도넛>(2019)은 거대한 규모나 산업적 소재나 누가 봐도 미국적 허상이다. <빛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2013-2020)는 사치품으로 향유될 도넛의 허상이다. 값싼 식용 품목의 예술화는 값비싼 술품의 가치를 되묻는다. 실재와 허구의 구별은 더 이상 무의미하고, 종국의 유의미는 자본의 스펙터클에 있는 것인가.

김재용, 아주 아주 큰 크롬 별 도넛 S0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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