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카츠, 아름다움의 구원, 아트 앤 마인드
* [cabinet de collectionneur] 실험실은 언젠가 긴 글이 될지도 모를 글감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입니다.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새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cabinet de collectionneur] 실험실은 언젠가 긴 글이 될지도 모를 글감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입니다.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새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cabinet de collectionneur] 시리즈 소개글 읽기
미술관 여행자로 살아온 지난 10여 년의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깨달은 것은 내가 인물화를 편애한다는 사실이다. 인물화를 마주 대할 때 내 몸이 보이는 반응은 좋은 대화를 할 때 내 몸이 보이는 반응과 유사하다. 타인의 눈동자, 뺨, 입가에 스치는 감정을 알아보기 위해 집중하는 느낌, 모든 레이더망을 그에게로 펼치는 느낌, 저쪽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몸을 맡기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느낌이 좋아서 인물화를 사랑했다.
인물화를 볼 때 몸은 그림으로부터 50cm 정도 떨어진 물리적 현실에 있지만, 상상으로는 쉬이 액자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 수 있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모호하지만 눈을 떼기 힘든 몸짓,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는 눈빛이나 표정으로 나의 경계 넘기를 독려해주었다.
하지만 대구미술관에서 본 알렉스 카츠의 그림 속 사람들과는 이런 방식으로 교감할 수 없었다. 분명히 사람이 주인공이고, 화폭이 꽉 찰 정도로 누군가의 얼굴이 담겼는데도 좀처럼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비어 있는 얼굴이었다. 어떤 깊이나 이면을 갖지 않은, 오직 '표면'으로서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화가들은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매개 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정서, 주장을 담아왔다. 정복자의 초상은 그의 생김새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용도로 그려졌다기보다 그가 가진 '기개, 용기, 카리스마'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여성 누드화부터 화가의 자화상까지 사람을 그린 그림들은 대개 그랬다.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 정서, 심상, 의미가 '기의'였다면 얼굴은 그것을 배달하는 '기표'였다.
하지만 카츠가 그린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볼 수 있는 나의 얼굴 뒤에 볼 수 없는 의미를 넌지시 숨겨놓는 짓을 왜 해?"
예를 들어 미소 짓는 '샤샤'는 플라스틱 마네킹 같다. 분명 이까지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는데, 그림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나 경쾌한 에너지가 없다. '자본주의 미소'라는 이름이 붙은 셀러브리티의 미소 같기도 하다. 이런 공허감을 자아내는 건 무엇보다 샤샤의 눈이다. 알렉스 카츠가 그린 인물화 속 눈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하다. 피부색과 같은 색으로 눈동자 흰자위를 칠해서 눈의 깊이감을 없애고, 화장할 때 아이라인을 그리듯 위쪽 외곽선을 그려 눈의 경계를 표시한다. 홍채 역시 멀리서 보면 까만 점, 가까이에서 보면 약간의 질감 표현이 된 까만 점 정도로 보인다.
눈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걸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고여 든 이야기, 그러니까 각자의 사연이 어쩌지 못하고 스며 나오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들켜버리거나 발견될 수 있다. 타인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이 그리 많지 않더라도 많은 이야기를 이미 들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카츠의 눈은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알렉스 카츠는 익히 알려진 대로 추상주의가 1950~60년대 뉴욕을 휩쓸 때 고집스레 구상회화를 떠나지 않은 화가다. 1927년 생으로 마크 로스코가 활동하던 시기에 카츠 역시 이미 화가로 활동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순한 색채, 넓은 색면, 평면적 구성, 잘라내고 부각하는 프레이밍, 단순화한 얼굴 등 고유한 작업 방식을 유지해오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보다 양식과 외양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내용 대신에 양식을, 아니 양식이 곧 내용이 되도록 하고 싶다. (...) 사실 나는 의미가 텅 비는, 내용이 텅 비는 쪽이 더 좋다.
책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에 인용된 카츠의 말을 읽고 나서야 그의 인물화에서 풍기는 공허감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카츠의 인물화를 책으로 비유하자면 단어를 모두 해체시켜 읽을 수 없게 하고, 단어가 그저 종이 위 까만 얼룩으로 보이게 의도한 책이다. 일부러 알맹이를 배제하고 포장지로만 구축한 세계. 카츠가 없었다면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없었을 거라는 말이 이제 내 안에서 맥락을 갖게 됐다.
화가가 1957년부터 현재까지 약 300점 가까이 그린 아내 에이다(Ada)가 등장한 그림에서도 역시 같은 인상을 받았다. 에이다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을지, 어떤 취향을 가졌을지, 어떤 고민과 어떤 욕망을 가졌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볼 수 있지만 읽을 수는 없는, 먼 이국 땅의 언어로 적힌 매혹적인 책을 마주한 것 같았다.
카츠는 '그려지는 대상의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 것, 즉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객관적 대상으로 전환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출처_리안갤러리)'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내를 바라볼 때도 '내가 알던 에이다'로 보지 않기 위해 애써 노력했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에이다를 매일 지우려는 노력, 아무런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시선으로 지금 저기 있는 에이다의 외양만을 보려고 한 노력.
에이다라는 책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심지어 그 이야기를 무척 사랑하면서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공들여 지우고 해체해 타인에게 읽히지 않도록 만든다. 카츠는 왜 이런 작업 방식을 고수할까? 볼 수는 있지만 읽을 수는 없는 책 같은 카츠의 인물화에서 감상자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뭘까?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양성을 가진 수많은 타자의 얼굴이 결국은 전부 '카츠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접근이 쉽고, 위험하지 않으며, 광고판 속 이미지처럼(실제로 카츠는 대상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확대하는 구성을 빌보드 광고판 이미지에서 배웠다고 한다) 매끄럽고 균질한 얼굴로 정제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q1MTkgOMSs
카츠가 5시간에 걸쳐 'January 3'이라는 작품을 채색하는 과정을 기록 편집한 영상이 전시장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위의 유튜브 영상은 그 작업 영상을 훨씬 더 짧게 압축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전시장에서 작업 과정 영상을 보면서 나는 여러 번 감탄했는데, 무엇보다 페인트 붓을 들고 인물의 피부를 채우는 카츠의 손길이 너무나 '촉각적'이라는 점에 놀랐다. 카츠는 그림 속 여자의 살결을 채워나갈 때 붓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툭툭 찍거나 휘휘 흔들거나 슥슥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슥-삭슥-삭, 진자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카츠 특유의 매끄러운 색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캔버스를 쓰다듬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얼마 전 읽은 책 속 문장이 떠올랐다.
롤랑 바르트는 촉각이 "가장 마술적인 감각인 시각과는 반대로 여러 감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탈신비화하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시각은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촉각은 거리를 제거한다. 거리 없이는 신비도 있을 수 없다. 탈신비화는 모든 것을 즐기고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촉각은 완전히 다른 타자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자신이 만지는 것마다 세속화한다.
-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중
'매끄러움'은 촉각적 인상이다. 카츠는 눈으로 타자의 표면을 쓰다듬는다. 내 마음대로 위 구절의 마지막 문장을 바꿔보았다. 카츠가 만지는 얼굴마다 카츠화된다.
카츠의 인물화는 대부분 모델의 이름이 작품명이 된다. 빌, 개빈, 샤샤, 신시아...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 이름 역시 감상자에게는 의미나 내용이 되지 못한다. 노란 배경 속 '빌'의 얼굴을 눈 한가득 담으면서 바로 옆 작품 속 모델인 '개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개빈, 개빈, 개빈... 감상자로서 어떤 심적 변화도 겪지 않았다. 빌이라고 불리든 개빈이라고 불리든 결국 내가 이 얼굴을 가진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돋았다. 내 이름이 애당초 혜진이 아니라 선영이었다면, 나라는 사람은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됐을까?
카츠의 작품 안에서 사람은 영영 알 수 없는 존재,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타자이다. 내용을 읽을 수는 없지만 생김새는 너무나 매혹적인 외국책을 마주할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읽을 수 없음을 한탄하고 비관에 빠져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내 멋대로' '자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기고 탐닉하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카츠의 선택은 후자였던 것 같다. 그렇게 모두를 눈으로 쓰다듬어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의 유희하는 시선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전자책 기준 35/87쪽
"우리는 반복해서 일어나는 무의식의 해방이 그들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표현’은 뇌에서 팔로, 팔에서 다시 종이로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이는 때론 마법 같은 결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매우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인간의 뇌가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기관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 복잡성과 정밀함…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줘요. 예술과 독창성을 사명으로 밀고 나갔던 예술가들이 사실은 우리와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단 것을."
* [cabinet de collectionneur] 실험실은 언젠가 긴 글이 될지도 모를 글감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입니다.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새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