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어느 날 아침> x 황성혜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출간 기념 북 토크 날의 일이다. 행사에 참가하는 독자들의 고민을 미리 받아서 그림책을 추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힘든 마음이 좀처럼 수습되지 않는다는 사연에 눈길이 오래갔다. 당시 내 마음의 첫 반응은 이것이었다.
'나는 반려동물을 길러본 경험이 없는데,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블로그에 '그림책 처방'을 연재하는 동안에도 비슷한 자문을 자주 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사건으로 힘겨워하는 독자가 편지를 보내올 때면 마음을 다해 글로 그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것 아닌가 늘 조심스러웠다.
이 걱정의 밑바탕에는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은 한 그 일을 겪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 전제를 크게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엄마가 아이의 놀이를 일일이 기획해주는 '엄마표 놀이' 포스팅이 범람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글을 썼을 때의 일이다. 글의 취지에 공감한다는 대다수의 댓글 가운데 유독 따갑게 느껴지는 댓글이 있었다. "아이 낳으신 후 최혜진 님의 놀이법도 궁금해지네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 말투였지만, 아무래도 배후에 다른 뜻이 있는 듯했다. '육아 경험이 없는 당신이 엄마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읽혔다.
남자다움의 틀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로 남성 상담을 오래 한 전문가를 취재해 기사를 썼을 땐 한 독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여자 상담가가 남자 마음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나요?" 오랜 시간 동안 상담심리 공부를 하고 임상 경험도 풍부하고 책을 수두룩하게 쓴 전문가를 향해 세워진 '차단의 벽'의 근거는 딱 하나였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인데, 남자로서의 경험이 없는 당신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아, 그건 네가 안 겪어봐서 그래"라는 말을 일상 속에서 자주 주고받는 문화이지만, 나 역시 두려울 때가 있지만, 벽을 넘고 싶었다. 같은 '사건'을 겪어야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공감이 반드시 같은 성별, 같은 직업, 같은 나이대, 같은 경험을 전제 조건으로 하지는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찾아낸 공감의 요령은 사건이 아닌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을 허락하기. 타인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 상태를 상상해보는 행위를 나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
다시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북 토크 때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면, 반려견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겪어본 적 없지만 소중한 존재를 잃은 상실감이라는 감정은 내게도 익숙하기에 '상실감'에 집중한다. 타인의 상실감의 색채가 내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우리 사이 감정의 공유지에서부터 시작하자고 결심하고 영혼의 무게를 실어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런 마음을 담아 <어느 날 아침>을 권했다.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은 어느 날 아침 한쪽 뿔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 며칠을 울다가 뿔을 찾으러 떠나기로 결심한다.
뿔이 한쪽에만 남아 있어서 뒤뚱뒤뚱 거리며 균형 잡기 어려워하는 사슴에게 개미핥기가 다가온다. 사슴뿔과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와서 사슴에게 건넨다.
뿔을 잃어버려서 힘들다는 사슴의 말에 개미핥기는 답한다. "그랬구나. 나도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끼던 나뭇가지를 잃어버린 적이 있어."
개미핥기와 헤어지고 길을 가다 사슴은 곤경에 처한 쥐토끼 가족을 나무 뿔로 구해준다. 뿔을 잃어버렸다는 사슴의 말에 쥐토끼 가족은 답한다. "그랬구나. 우리도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말려놓았던 겨울 식량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
이어지는 여정에서 사슴은 자신의 반쪽을 잃었다며 울고 있는 밤하늘의 달을 만나고, 사슴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진다.
이렇게 다양한 존재와 만나면서 사슴은 '상실감'이라는 감정으로 그들과 연결된다. "네가 뿔을 잃어버려 봤어? 뿔이 없는 네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라고 차단하거나 밀쳐내지 않고 "정말 슬펐겠다, 무척 속상했겠다"라며 그들과 밀착한다.
반려견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독자에게 <어느 날 아침>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반려견을 길러본 적은 없지만, 소중한 존재를 잃은 듯한 상실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요. 우리 모두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이지만, 소중했던 무언가를 잃어본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연결시키는 건 바로 그 상실감과 슬픔일 거예요. 지금은 너무 아프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혼자가 아닐 수 있어요. 이어질 수 있어요."
서로의 감정을 포갤 수 있는 공유된 영역이 있다는 믿음은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야"라는 말이 품고 있는 무신경함, 게으름과는 다르다.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 아니다. 하나도 같지 않다. 우리 각자는 모두 유일한 하나의 이야기이다. 구비구비 펼쳐지는 생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지만,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감정의 영역에서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
평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림책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를 발견했을 때 황홀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책은 작은 동그라미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작은 동그라미였어요.
모두 동그라미였지만,
똑같은 동그라미는 아니었어요.
모두 무언가를 가만히 기다렸어요.
- 황성혜,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 중
이 동그라미 형상들에게 어느 날 무언가가 다가온다.
파란 꿈
꿈이 지나간 뒤에는 빨간 열정
투명한 상상
꼬불꼬불 갈등
까만 아픔
...
빨간 열정이 지나가고 난 뒤 어떤 동그라미는 빨간 코를 갖게 되지만, 다른 동그라미는 마름모꼴 빨간 모자를 갖게 된다. 다른 동그라미에겐 빨간 원피스가 남는다. 그렇게 저마다의 외양이 구체화된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작은 동그라미들은 조금은 파랗고 조금은 빨갛고 어쩐지 꼬불꼬불하고 까만, 저마다의 흔적을 갖게 된다.
빨간 열정은 모두에게 빨강을 남겼지만, 똑같은 빨강은 아니었지요.
갈등이 찾아왔어요.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것이 남겨 준 무늬는 아주 근사했지요.
아픔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겼어요. 덕분에 나에게는 까망도 생겼어요.
- 황성혜,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 중
사건이 아니라 감정으로 우리는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 세계를 전부 집어삼킬 듯한 새까만 고통을 통과하고 나서도 아픔 덕분에 나에게 까망'도' 생겼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까망으로 다른 존재의 까망을 알아볼 수 있다.
책 표지를 다시 본다. 파랑 조금, 빨강 조금, 까망 조금, 꼬불꼬불한 선 약간... 동일한 감정의 색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같이 제각각의 외양을 가진 동그라미들이 있다. 그들이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당신은 내가 아니지만, 나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