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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y 14. 2019

믿을 건 타오르는 애정 뿐

로라 테레사 알마 테더마,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톤, 이윤기

* [cabinet de collectionneur] 실험실은 언젠가 긴 글이 될지도 모를 글감을 아카이빙하는 공간입니다.  브런치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새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cabinet de collectionneur] 시리즈 소개글 읽기





사람의 무지는 보물이므로, 아무렇게나 써 버리면 안 된다.
- 폴 발레리

수전 손택의 일기책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읽다 위의 문장을 발견했을 때, 뿌연 안개로 가득 찬 새벽녘 골목길을 걷다가 돌연 모든 시야에 초점이 쨍 맞는 한낮의 풀밭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았다.

2014년에 출간한 첫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 첫 꼭지를 구구절절 써 내려갈 때, 그러니까 스스로 작가라는 의식이 없을 때부터 막연한 직감으로 글로 옮겨 보려 노력했던 진실 하나가 더없이 정확한 문장으로 나에게 도착한 느낌이었다. 밑줄을 긋고, 노트북을 열어 필사 파일에 옮겨 적고, 스마트폰 메모장에도 옮기고, 일기장에도 한번 더 적었다.


수전 손택은 폴 발레리 문장에 이렇게 덧붙여 놓았다. <비평을 읽으면 새로운 생각들이 유입되는 배관이 막힌다. 문화적 콜레스테롤.> 비평문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지식이나 타인의 관점을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무지는 보물이므로 아무렇게나 써 버리지 말 것, 함부로 이해해 버리지 말 것. 아무리 그래도 비평이 콜레스테롤이라니.


평생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네 권의 평론집을 내기도 했던 수전 손택이 혼자만 보는 일기장에 이런 문장을 쓰고 있었던 걸 상상하면 어쩐지 은밀하기도, 통쾌하기도 하다.


The House Maid, William McGregor Paxton, 1910


미국 화가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톤이 그린 그림 속에서 가정부는 청소를 하다 말고 뭔가에 사로잡혔다. 보드라운 거위 깃털 먼지떨이로 도자기들을 조심스레 톡톡 쓰다듬다가 두툼한 책에 별 뜻 없이 손을 뻗는다. 휘르륵 아무 장이나 펼쳐 눈길 닿는 대로 글을 읽다가 자연스레 먼지떨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아마 가정부는 모를 것이다. 먼 이국에서부터 모아 온 진귀한 도기들의 미적 가치나 미술사적 의미 같은 것은. 자신을 온통 집중하게 만든 책의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의미가 담긴 작품인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무척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고,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아! 하고 감탄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그림 속 여성의 하얀 목덜미나 올올이 탐스러운 금발 머릿결이 주는 인상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문을 빼꼼히 열어보게 된, 그렇게 문 뒤의 세계를 발견하고 달뜬 마음과 붉은 뺨을 갖게 된 애호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문 뒤의 세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냥 너무 좋아져 버려서 그 마음에 충실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 애호가, 아마추어 혹은 취미 생활자라 불리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 존경스럽다, 진심으로.


최근 나가는 모임이 생겼다. 창비학당 '그림에게 묻고 쓰기' 수업을 들었던 학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다. 수업에서 배운 방법대로 와 닿는 그림을 고르고, 질문과 답을 스스로 짜고, 자유롭게 연상해서 각자 글 한 편씩을 써온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구성원들의 포용과 지지가 탄탄한 심리적 안전망이 되어 큰 부끄러움 없이 타인 앞에서 자기 글을 낭독할 수 있는 모임이다.


이 모임에 다녀온 날에는 반드시 일기장을 펼치게 된다. 커다란 질문이 머릿속을 채우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을 갖고도 매일 쓰는 사람,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더 좋은 글을 위해 서너 번씩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사람, 세상에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 진짜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그들과 소위 '프로페셔널'로 대접받으면서 때때로 타인의 글을 평가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들을 애호가 혹은 아직 작가가 아닌 사람이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임에 나갈 때마다 머릿속으로 '겸손'이라는 단어를 이리저리 굴린다.


Anna Leafing through a Portfolio of Prints, Laura Theresa Alma-Tadema, 1874


아마추어(amateur)는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사랑해서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아니 거의 모든 순간에 성취하기 위해 하는 사람들보다 낫다. 조르조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에서 이렇게 썼다.


"무슈 주르댕의 모순은 그가 그의 선생들보다 정직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민감하고, 아울러 그에게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보다 예술에 대해 훨씬 더 열린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에 있다. 이 저속한 인간은 아름다움의 포로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산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 무지한 인간은 문학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하는 말 역시 어찌 되었든 산문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감흥은 바라보는 대상을 평가할 줄 모르지만, (...) 그가 돈 주머니 안에서만 생각할 줄 안다고 보는 취향의 인간에 비하면 그의 감흥이 훨씬 더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프로들은, 선생들은, 평가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앎'을 무기 삼아 사랑밖에 가진 게 없는 자들의 '무지'를, 기꺼이 포로가 되려는 그 '달뜬 마음'을 무시하곤 하지만, 무엇이 진짜 예술에 가까운지 모르는 건 정작 그들이다.



어느새 다섯 권의 책을 냈다. 출판계가 돌아가는 방식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렇게 저렇게 글을 쓰면 이런 책을 낼 수 있겠군' 하며 앞날을 그려볼 정도가 됐다. 능숙이라면 능숙이고, 전문성이라면 전문성이라 부를 수 있는 뭔가가 내 안에 쌓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자꾸 딴 생각이 든다.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으면서 출판 시장에 대해, 그림책 업계에 대해, 미술 전문서의 세계와 전문가들에 대해 몰랐으면 싶다. 앎이 틀이 될까 두렵다. 지식이 사랑을 검열할까봐 무섭다. 무식해서 용감할 수 있었던, 믿을 건 타오르는 애정 뿐이었던 나의 어느 한 시절을 잃어가는 것 아닌지 조바심이 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일면 진실이지만, 반쪽짜리 진실이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아는 것만 본다는 뜻도 된다. '무지'를 달리 말하면 '미지'가 된다. 마법, 신비, 기적적인 만남은 언제나 미지로부터 온다. 



무지를 아름답게 여긴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나비가 바다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그 수심水深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는 제 몸무게를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하늘을 더 잘 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디를 향하고 어떻게 올라가고 있는지 모를 때 어쩌면 가장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는 말도 있다. 

- 이윤기,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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