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을 하다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이 와 닿아서 눌러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미술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데 전시회 가도 재밌을까요?> 글쓴이가 궁금해하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미술에 막연한 호기심이 있으나 지식이 전무해 돈 내고 미술관에 가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혼자 미술관에 가보려는데 정말로 미술관 가서 보면 느낌이 좀 다르긴 다른가?’
댓글도 재미있었습니다. 나도 ‘미알못’인데 가보니 괜찮더라, 도슨트 설명을 꼭 챙겨 들어라, 여자친구 때문에 억지로 다닌다, 현대미술은 피해라, 봐도 아무 느낌 없다, 미술관과 담쌓았다, 일단 유명한 화가부터 봐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니 가기 전에 책을 읽어라… 짧은 게시글 안에 제도권 미술을 바라보는 대중의 다양하고도 솔직한 시선이 모두 담겨있는 듯했어요.
저는 미술은 어쩐지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꽤 일리 있다고 생각해요. 알고 보면 하루 이틀 만에 생긴 거리감이 아니거든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가 1979년에 발표한 연구서 <구별짓기 : 판단의 사회적 비판>은 사회학 분야의 손꼽히는 명저인데요, 흔히 우리는 취향을 ‘개인적 차원’의 일로 받아들이지만, 알고 보면 사회 계급에 따라 문화 취향의 경향성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교육 수준이 높고 문화 자본을 많이 가진 ‘정통적 취향(상류계급)’의 사람들은 대상을 미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모호한 이미지를 보고도 흥미롭다고 느끼는 반면, ‘중간층 취향(중간계급), 대중적 취향(하층계급)’의 사람들은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에는 반응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미적 취향은 결국 대상을 미적으로 구성해 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형성되는데, 이 안목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외교학자 홍성민 교수는 책 <취향의 정치학>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은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권위를 학교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생각해보면 저 역시 최초로 미술을 교육받은 공간은 학교였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 기억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일 거라고 믿어 왔고,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해석이 곧 미술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상한 일이죠. 지금은 먼 나라 미술관에 가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기꺼이 날아가는 애호가가 되었지만, 학창 시절에 저는 미술시간이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아래는 한 중학교 2학년 미술 기말고사 시험지에서 발췌한 문제입니다. 한번 같이 풀어 보실래요?
Q1. 색입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타원형 중심에서 유채색의 축이 있다.
2) 색상, 명도, 채도를 알아보기 쉽게 배열해 놓은 것이다.
3) 중심축은 맨 위가 검정(0), 맨 아래가 흰색(10)의 11단계이다.
4) 횡단면도는 같은 채도의 색상과 명도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5) 종단면도는 동일색상의 명도와 채도를 볼 수 있으며, 반대쪽에는 유사색이 나타난다.
Q2. 19세기 미술은 무엇인가?
1) 추상파
2) 표현파
3) 입체파
4) 사실파
5) 야수파
Q3. 야수파에 관한 설명이다. 바른 것은 무엇인가?
1) 대상을 분해하여 화면을 재구성
2) 강한 터치와 대담한 변형
3) 대담한 변형을 통한 내면의 세계를 표현
4) 잠재의식 속의 꿈, 상상 등을 표현
5) 극단적인 주관성과 강한 색채 표현
중학교 2학년 시험 문제라는 사실에 저 혼자만 당혹스러웠을까요? 그나마 간단해 보이는 2번 문제를 맞혀 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습니다. ‘미술 사조는 각 국가별로 상황에 따라 상이한 속도와 흐름으로 발전하는데, 19세기 미술이라고 똑 잘라서 말할 수 있는 사조가 진짜 존재한다는 말이야? 지문은 어느 나라의 19세기 미술을 뜻하는 거지? 그나저나 어떤 사조가 19세기 사조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하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동공 지진’만 일어났습니다.
위 시험 문제는 최초의 미술 경험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 자리 잡았는지 이해하는데 큰 힌트를 줍니다. 우리는 미술 감상 교육 대신 미술사 교육, 미술이론 교육을 받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작품을 볼 때 자기 안에 피어오르는 인상, 감정,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고 나누는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과거 권위 있는 미술사학자들이 정리한 지식 체계를 습득하는 능력을 갖도록 교육받은 셈입니다. 거기에 시험이라는 평가까지 거쳐야 했고, 게다가 구술형 시험도 아니고 다지선다형 보기 중 정답 하나만 골라야 했으니 미술을 떠올리면 ‘틀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즉각 따라오는 게 무리도 아닙니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중간층 취향, 대중적 취향’까지 포함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우리에게 미술을 다지선다형 보기 속에서 알아맞혀야 할 단 하나의 정답, 지식을 암기하지 못하면 통과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제, 언제나 옳은 대답만 해야 하는 세계로 각인시킨 것입니다. 이를 상쇄하는 대안 교육, 가정교육, 사적 경험이 있지 않은 한 미술에 대한 최초의 경험은 이렇게 굳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창 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무릅쓰고 미술 애호가가 된다 하더라도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동시대 미술이라 할 수 있는 현대미술은 한마디로 설명하고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미술이 오직 미술 그 자체만을 위한 진보를 꾀해왔고,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은 추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길 원하며, 수직적이었던 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관계가 수평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작품 안에 숨겨놓은 의도가 절대적 정답처럼 존재하고, 감상자는 그것을 잘 찾아내는 식의 감상법이 통하지 않는 세계, 한마디로 정답 없는 세계이죠.
학교에서는 하나의 정답 찾는 법만 배웠는데, 막상 미술관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 나서라고 독려합니다. 미술 감상 훈련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실전에 뛰어들어야 하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해요. 작품 앞에서 피어오르는 느낌을 포착해 자신의 인식 체계 안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찾아 자기만의 해석을 갖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특히 다음과 같은 현대미술 작품을 마주할 때면 복잡한 심경이 되어 버립니다.
5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그려진 두 예술가의 추상화가 시각적으로 흡사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이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쓴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입니다. 두 작품 말고도 검정 색면 추상화는 현대미술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서로 다른 화가들이 결과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각적으로 동일한 각각의 작품에 대해 각기 다른 감상을 가져야 할까요?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감상 행위를 수행하고 싶은 의지가 있어도 현대미술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개인적 해석이나 깨달음의 단초가 되는 최초의 느낌조차 가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는 그림으로 대상을 재현한다는 오랜 관념을 깨기 위해 순수한 검정과 사각형으로만 화폭을 구성한 추상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미술은 오랫동안 어떤 사물이나 자연을 재현하는 장이었습니다. 말레비치는 대상을 그린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모든 색과 형태가 소멸한 것 같은 단순한 구성으로 순수한 감정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단 하나의 시점만 가진 형태를 해체시킨 피카소보다 한발 더 나아가 그 무엇도 중개하지 않은 화폭을 관람객에게 들이민 최초의 화가였다고 하네요. 극도로 단순한 말레비치의 작품들은 이후 미니멀리즘 사조가 탄생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하고요.
애드 라인하르트 Ad Reinhardt는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당시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는 19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모더니즘이 뉴욕에서 꽃피었다고 강조하면서 ‘아메리칸 타입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다소 저렴하게 표현해보자면 대대적인 ‘국뽕’ 전략이었죠. (이러한 시도는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마크 로스코 Mark Rothko는 물론 색면추상화가 바넷 뉴먼 Barnett Newman, 추상 표현주의 화가 한스 호프만 Hans Hofmann 등이 미국형 화가로서 이름을 올렸는데요. 동시대에 활동한 애드 라인하르트는 여기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기 미술 철학의 근본으로 늘 동양의 선불교를 언급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라인하르트는 일체의 표현을 거부하고, 시간을 초월한 반복성을 추구하며, 극도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흡사 숭고한 종교의식을 치르듯 작업했고요. 그의 블랙 페인팅은 ‘예술로서의 예술’이라는 이상에 다가가기 위한 구도자적인 노력이었다고 하네요.
두 화가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덧붙인 이유는 현대미술이 감상자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전에는 소통을 위한 노력이 창작자의 몫이었다면(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전달되도록 테크닉을 연마하고 구현할 책임이 창작자에게 있었다면) 지금의 미술가들은 스무고개 퀴즈를 내듯 작품을 세상에 던져놓습니다. 관람자가 감상과 이해를 위한 모든 노력을 껴안아야 하는 상황이죠.
작가가 왜 이러한 표현 방법을 선택했는지, 왜 이런 재료를 선택했는지, 그가 처했던 당대 사회 현실은 어떠했는지, 미술사에서는 어떤 맥락 안에 있었는지 자료를 찾아보아야 겨우 느낌이 올까 말까 한 작품이 꽤 많습니다. 이런 미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분명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예술사학자 바바라 로즈 Barbara Rose는 미니멀 아트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이 새로운 미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이 미술은 불친절하고 비감상적이며 자전적 흔적도 거의 없다. 그래서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당신이 처음 보았을 때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면, 아마 앞으로도 내내 그럴 가능성이 크다. 당신의 첫눈에 띈 바로 그것,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윤자정, 미니멀리즘과 ‘상황의 미학’, 제13호 현대 미술학 논문집에서 재인용
두 블랙 페인팅의 사례에서 보았듯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나 표현이 거의 흡사한 작품들을 보면 일반 관람객 입장에서는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말레비치의 검정과 라인하르트의 검정 중에 어떤 작품이 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해야 할까요?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프랑스 추상화가 이브 클라인 Yves Klein이 자신이 직접 작곡한 ‘단음 교향곡’이 연주되는 동안 나체의 여성에게 파란 물감을 묻혀서 캔버스에 이리저리 굴려 만든 모노크롬 회화는 미술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되어 있죠.
그렇다면 2017년 가수 솔비(권지안)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자신의 미니앨범 ‘하이퍼리즘:레드’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새 음악에 맞춰 온 몸에 물감을 바르고 페인팅 퍼포먼스를 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행위가 같으니 내포된 미적 가치도 같은 걸까요? 만약 다르다면 두 작업을 왜 다르게 대접해야 하는 걸까요?
'예술에 있어서 반복보다 더 무가치한 것은 없다'라고 말한 스페인 문화비평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의 선언처럼 뭐든 처음 시도하는 작가가 가치를 선점하는 걸까요? 새롭기만 하다면 그 안에 미적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 미술가들은 자신만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해 예술가의 똥, 고문 도구, 포르노그래피, 동물 사체, 심지어 살아있는 동물까지 미술관 안으로 들입니다. 이것을 용기나 저항이라고 불러야 할지, 객기라고 불러야 할지, 혹은 새로움을 향한 몸부림으로 봐야 할지 관람객 입장에서는 난처하기만 합니다.
아니, 관람객만 난처한 건 아닌 듯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벨벳 버즈소>는 갤러리스트-아트 딜러-비평가의 삼각 연대가 현대 미술 시장에서 특정 예술가를 어떻게 띄우는지 생생하게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초대형 스타 작가를 전속으로 모시려고 애쓰는 한 갤러리스트가 화가의 아틀리에에 놓인 쓰레기를 보면서 호들갑 떠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갤러리스트조차 쓰레기와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현대미술의 처지라는 일종의 비꼬기였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시달리다가 신선한 재충전의 감각을 느끼기 위해 미술관에 걸음 하는 관람객 입장에서는 즉각적 감동이나 쾌감은 거의 주지 않고 답 안 나오는 커다란 숙제만 잔뜩 선사하는 것 같은 미술 작품이 피곤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사는 것도 빡빡하고 힘든데 미술 감상을 위해 이렇게까지 에너지 쓸 일인가 싶은 회의감이 드는 게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일이죠. 즉각적인 감탄을 이끌어내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나 쉬이 인지되는 구상 미술에 대한 대중의 선호와 편애가 저는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이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스스로 ‘미알못’이라고 느끼는 당신이 미술관 문턱에서 부담감을 느끼는 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왠지 주눅 들고,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당신이 유독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최초의 미술 경험을 남긴 학교가 그렇게 가르쳤고, 일부의 동시대 미술은 피로, 난독증, 판단 중지를 불러일으키면서 미술 전체를 향한 거리두기, 비아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미술관의 출발점을 들여다보면 애당초 모두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죠. 다음 글에서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