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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r 04. 2020

3월부터 진짜 시작이니까


2020년엔 일력을 쓴다. 매일 한 장을 뜯어내며 시간의 흐름을 두 손의 촉감으로 실감한다. 좋아하는 최진영 작가님 그림을 버리기 아까워 매일 뜯어낸 일력 뒷장에 그날의 질문을 한 줄씩 적는다. 


"아무 생각없이 푹 쉰 날이 언제야?"

"10년 전의 너에게 돌아가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니?"

"익숙한 길로만 다니진 않니?" 같은 질문.


그리고 종이를 반절로 세 번 접은 후 상자 안에 넣는다. 2021년을 위한 준비다. 내년에는 매일 꺼낼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특정한 과거 날짜에 내가 품었던 질문이 현재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다. 우연이 만들어내는 연결을 즐기면서 '과거의 나로부터 온 질문'에 대답하는 일기를 쓸 예정이다. 


하루 한 장 뜯어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달력이 지난 날짜에 멈춰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2월이 그랬다. 머릿속을 꽉 채운 어떤 이슈로 일력을 뭉텅뭉텅 떼어낼 때가 많았다. 


3월엔 다시 제대로 출발선에 서는 느낌으로 2020년의 계획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 <우리 각자의 미술관> 4월 출간 


'그림에게 묻고 쓰기'라는 가제로 부르고 있었던 여섯 번째 책의 제목은 <우리 각자의 미술관>으로 정해졌다. 초고는 지난 가을에 진작 끝냈지만, 출판사 내부 일정과 코로나 여파 등을 고려해 2020년 4월에 출간을 하기로 잠정 계획을 세우고 있다. 

원고를 마치고 벌써 6개월이 지난 터라 지금의 나는 이 원고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 한창 몰두해 있을 때만큼 활활 불타오를 수 있을까 걱정이 조금 되지만, 교정지를 읽다보면 다시 불길이 되살아나겠지. 작년 내내 나를 불타오르게 했던 원고니까. 




# 소피 반 더 린덴 그림책 이론서 <l'album[s]> 번역 완료 


작년 9월부터 (수술과 입원으로 쉬었던 12월 한 달을 제하고) 매일 꼬박꼬박 두 쪽씩 그림책 이론서를 번역했다. 전문서 번역에는 처음 도전한 건데,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다. 


번역은 정말 고되고 힘든 작업이다. 원저자의 의도가 뭘까, 왜 이런 식으로 문장 구조를 만들었을까, 왜 이 단어를 썼을까? 생각하면서 아주 천천히 더디게 나아가야 한다. 내 생각을 검열없이 써재낄 때 느끼는 후련함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책 전체적으로 전문 용어를 일관되게 번역했는지, 같은 단어여도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혹시 기계적으로 번역하진 않았는지 쉼없이 원고 앞뒤를 오가며 점검해야 한다. 

원활한 작업을 위해 용어 노트를 만들고, 도판 목록 엑셀을 만들고, 참고한 웹 페이지 목록을 만든다. 어학 사전이 포섭하지 못한 개념의 회색지대를 나다니는 끈기 뿐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시스템을 마련하는 '공대 갬성'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노력한만큼 나아지는 게 눈에 즉각 보이는 정직한 작업이기도 했다. 오늘 분량을 미루면 내일의 내가 악 소리나는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스스로의 끈기 없음을 자주 한탄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나는 일단 목적에 동의가 되면 과정이 힘들다는 사실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 <l'album[s]> 원서 스터디 모임 


<l'album[s]> 번역을 처음 맡을 때부터 머릿속으로 그린 모임이 있다. 2주에 한 번씩 만나 <l'album[s]>의 번역본을 먼저 공부하고, 책에 언급된 여러 그림책 원서를 함께 읽는 모임. 그리고 같은 주제로 묶일만한 한국 그림책을 각자 조사해서 공유하는 모임이다. 이 모임을 위해 <l'album[s]>에 도판이 등장하는 그림책 원서들을 프랑스 중고책 서점까지 싹싹 뒤져서 준비해두었다. 

5인 이하의 소수 인원으로 6개월 정도 꾸준히 만나서 공부해보면 어떨까. 처음 번역 계약서를 쓰면서 출판사에 모임 아이디어를 전하고 격한 환영을 받았다. 외서의 이론을 한국 그림책에 적용해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화두와 정보, 그림책 목록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의견을 들었다. 


<l'album[s]>은 번역을 마쳤다고 뚝딱 나올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편집, 도판 권리 획득에 시간과 에너지가 무척 많이 드는 책이기 때문에 아마도 2020년 말이나 2021년 초에 한국어판이 나올 것이다. 그전에 몇몇이 모여 '딥'하게 공부하고 왁자지껄하게 수다 떠는 모임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모임 구성에 대한 공지는 조만간 별도로 올릴 예정이다.) 




# 빈센트 반 고흐, 프리다 칼로 그림책 번역 


동시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한 명씩 화가를 맡아 생애와 작품을 그림책으로 옮긴 멋진 시리즈가 있다. 원서는 영국 그림책이다. 편집자님이 번역 작업을 의뢰하는 메일을 주시자마자 하겠다고 했다. 첫 책이 빈센트 반 고흐 편이었기 때문이다. 열아홉 살 때 아이세움에서 출간한 어린이책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읽고 인생이 통째로 뒤바뀐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 그림책의 역자가 될 기회를 놓칠 순 없는 일. 이 화가 그림책 시리즈는 2020년 봄에서 여름에 차곡 차곡 결과물이 공개될 것 같다. 




# 3월부터는 다시 직장인 


나의 2020년 2월을 뭉텅이로 사라지게 한 이슈는 바로 '재입사'였다. 치열하고 긴 고민과 공부의 시간이 있었지만, 각설하고 말하자면 다시 회사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가서 하게 될 일이 너무 흥미로워서, 재밌을 것 같아서, 새로운 도전이라서 다음 책 집필은 조금 미루고 일단 회사로 간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프리랜서로 사는 마지막 날. 3월 2일부터는 콘텐츠 경험을 설계하고 창의성을 연구하는 업무에 많은 시간을 쓸 것이다. (내가 이끌게 될 팀 이름이 콘텐츠 경험 랩 contents experience lab이다.) 매거진 에디터, 디지털 콘텐츠 디렉터, 편집장, 블로거, 작가, 강연자, 기획자 등 지난 17년 동안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나의 커리어 패스가 하나의 서사로 꿰어지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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