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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Apr 12. 2023

분홍색... 좋아하세요?

그럼 그냥 좋아한다고 얘기해요. 그리고 마음껏 쓰세요.

제목은 슬램덩크 패러디가 맞다. 전설의 "농구 좋아하세요?"를 모르신다면 슬램덩크를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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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구한 취향은 분홍색이다. 분홍색을 약간 집착적으로 좋아하는데 이 시작점이 어딘가 하면 그건 모르겠다. 최초의 기억은 학창 시절이다. 무엇을 사든 분홍색을 집어드는 날 보면서 당시 친구가 상당히 질색하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호불호가 있을 것이다. 색상이 됐든 뭐가 됐든.

나는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전부 분홍색이길 바라는 사람이다. 옷, 신발, 가방 같은 기본적인 건 물론이고 회사에서 쓰는 개인적인 사무용품들도 대체로 분홍색이다. 연필꽂이와 탁상용 휴지통 등이 그렇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언젠가 혼자 살게 된다면 내가 사는 공간을 온통 분홍색으로 휘감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눈길이 닿는 모든 것에 분홍색과 흰색 외에는 그 어떤 색도 넣고 싶지 않다. 아직은 상상일 뿐이다. 취향이 이렇다 보니 옷도 대체로 분홍색이라 대체로 눈에 잘 띄게 마련이다. 이렇게 입고 다니면 어디서든 누군가 한 명은 꼭 내가 입은 것들에 대해 한 마디씩 해준다.

일주일에 두 번은 퇴근하고 필라테스를 하러 가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분홍색 샤스커트에 분홍색 맨투맨, 분홍색 운동화를 착장하고 겉옷은 청자켓을 입고 있었다. 데스크에서 접수 및 사무를 담당하시는 선생님이 문을 밀고 들어서는 날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하며 화사하고 예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그런 치마를 입어보고 싶다고 했던가. 그래서 나는 "입으시면 되죠~" 하고 가볍게 대꾸했는데 뒤이은 대답을 들으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시도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어울리지 않을 것을 걱정한 게 샤스커트인지 분홍색인지 둘 다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 됐든 마음은 비슷하게 좋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저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종종 드는 생각이다. 내가 이런 걸 입어도 되나, 이런 색은 작고 하얗고 마른 애들이나 해야 예쁜 거 아닌가. 그래도 이 혐오의 생각들을 저편으로 넘기고 과감하게 입고 쓰는 것은 그냥 좋아서. 좋으니까. 내가 좋다는데 누가 뭐라 할 권리가 있나 싶어서. 그래서다. 내 외모에 자신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기로 마음먹을 뿐이다. 어렸을 땐 굳이 애써서 마음먹지 않아도 잘 되던 건데 커가면서 점점 위축되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자기혐오는 끝없이 불어난다. 그래도 이걸 내가 어떻게든 끊어내지 않으면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잘 어울리고 아니고는 다음 문제다. 그냥 입고 우기면 잘 어울리는 게 된다.

유튜브 문명특급에 윤여정 배우님이 출연하셔서 내 생각과 비슷하게 대답하셨을 때 정말 큰 위로가 됐다. 어떻게 이런 옷들을 그토록 잘 소화하시냐는 재재 님의 질문에 윤여정 배우님은 "그냥 입고 우기면 된다"라고 대답하셨지. 정말 간단하고 가벼운 마음가짐이 아닌가.


언젠가부터 퍼스널 컬러가 대유행이 되면서 쿨톤이니 웜톤이니 하는 단어들이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참고 정도만 하면 되는데 남의 눈 잔뜩 신경 쓰면서 사는 한국인들 답게 나에게 맞는 퍼스널컬러는 이거라며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 아니다. 입어보기도 전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좋은 일은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색, 어울리는 옷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옷이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전문가 의견은 모르겠고. 내가 연예인이 될 것도 아니고 정치인 같은 공인이 될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겹게 TPO를 챙기면서 살아야 할까. 격식이 중요한 자리에선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단정한 차림, 편한 자리에선 편한 차림 이 정도만 지키고 살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좋아하는 것만 곁에 두며 신경 쓰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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