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보다 설레는 핏빛에 관하여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와는 관계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아무튼 시리즈 책들을 정말 좋아한다. 아무튼 뒤에 붙을 수 있는 단어가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경이로울 때가 종종 있다. 제법 여러 권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부동산 문제만 아니었으면 시리즈 1부터 차곡차곡 사모아 책꽂이에 진열했을 것이다. 시리즈로 나오는 종이뭉치들은 강렬한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내가 현재 발붙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시리즈를 전권 소장하려면(혹은 연재 중인 시리즈를 계속해서 모으려면) 반드시 그만큼의 공간을 내어줘야 한다. 단권으로 끝나는 단행본처럼 마구잡이로 쌓아두기엔 내 마음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시리즈는 어쩐지 책장에 순서대로 정갈하게 꽂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다.)
이렇게나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문자 N답게 온갖 상상도 다 해봤다. 내가 만약 아무튼을 쓰게 된다면, 그 뒤에 무엇을 붙이고 싶을까. 일단 나는 분홍색을 집착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튼, 핑크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행위를 좋아하기 때문에(좋아한다고 했지 잘한다고는 안 했다.) 아무튼 수공예 혹은 아무튼 바느질 따위를 넣으면 어떨까도 상상해 봤다. 전부 다 좋아하는 것들이고 나하고 뗄 수 없는 유무형의 것들이지만 왠지 매끄러운 느낌은 안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좋아하는(소규모의) 인원이 모여 있는 오픈 채팅방에서 M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핏빛을 써보시는 건 어때요."
이 문장이 나온 데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 나는 핏빛이 가득한 내용의 활자를 좋아한다. 영상보단 활자가 더 좋다.(아래 그림을 그려 업로드하신 이름 모를 분께 무한한 동질감과 감사를 동시에 전한다. 이 글을 보신다면 우리 친해져요...)
위 이미지는 우리 챗방에서 한동안 화두였고 특히 모임원들이 나를 향해 일점타격할 때 자주 올라오곤 했다. 그만큼 적절한 예시다. 그리고 정말 얄궂게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다정하고 따듯한 내용이 나라고 왜 싫겠는가. 다만 취향을 스펙트럼으로 그려봤을 때 핑크빛과 핏빛을 끝과 끝에 놓는다면 핏빛 쪽이 좀 더 진해질 뿐이다.(공교롭게도 핏빛과 핑크빛은 같은 계열의 색상이기도 하다.)
다만 무조건 피가 튀어야 좋은 건 아니다. 장르로 따지자면 디스토피아가 좋은 것이고 키워드로 나열해 본다면 절망, 좌절, 균열, 멸망 따위의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글이 좋은 것이다. 이런 키워드의 글을 써야 한다면 핏빛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것이다.
꼭 누가 죽어야만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멸망을 그리는데 아무도, 그 무엇도 소멸되지 않는 건 어불성설이다. 균열을 표현하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을 리 없다. 어쩌다 보니 디스토피아 장르에 매력을 느끼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작중에서 누군가는, 어떤 무리는, 어떤 세계는 기어코 축소되거나 사라지고야 마는 것뿐이다.
견고하고 단단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세계가 일부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해 기어코 부서져버리고야 마는 그 광경이 설레다 못해 황홀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발버둥 치면 칠 수록 균열이 메워지긴커녕 점점 더 큰 구멍을 만들어내는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즐겁다. 악취미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좋아하는 작가님 중에 김초엽 작가님이 있다. 김초엽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므레모사를 정말 사랑한다. 『므레모사』, 현대문학(2021)
김초엽 작가님의 여타 다른 소설들이 절망과 희망의 비율을 7:3 내지는 8:2 정도로 녹여냈다면 므레모사는 조그마한 희망조차 짓밟아버린 결말이다. 언제나 꿈도 희망도 없는 디스토피아적 결말에 목말랐던 나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저자 이름만 보고 산 책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더 많이, 더 풍부하게 써주셨으면 좋겠다고 홀로 바라고 또 바랐다. 조지 오웰의 『1984』도 이런 맥락에서 상당히 사랑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본인이 속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자 처절하게 발버둥 쳤으나 모든 노력은 독재자의 손아귀 위에서 물거품이 되었고 부서져버린 건 결국 주인공인 윈스턴 본인이다. (이를 두고 결말을 스포 했다고 말하는 분은 없길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세계에 균열을 내어 세계를 부수거나 주인공 혹은 등장인물들이 실패하여 본인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세계는 더욱더 견고하고 단단해지고야 마는, 요즘 표현으로는 고구마식 결말을 상당히 좋아하고 즐긴다.
정말로 악취미라고 해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런 장르를 마음 놓고 좋아하기 위해선 장르 속 세계와 내가 발붙이고 서있는 현실세계가 완벽히 유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상의, 픽션의 세계로서 그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것이지 그 세계를 현실에서 굳이 내가 온몸으로 겪어보고 싶지는 않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태여 찍어 먹어보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디스토피아가 현실에서 재현되는 것만큼 똥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부디 소설은 소설로, 영화는 영화로,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세계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마음 놓고 디스토피아를 즐길 수 있기를. 이 모든 건 그저 작가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종이에 갇힌 활자이기를 언제까지나 바라고 있다.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안전벨트가 있기 때문이고, 안전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고, 지속되는 스릴이 아니라 찰나의 짜릿함이기 때문인 것처럼. 핏빛이 그려지는 디스토피아도 책장을 덮으면 나와는 상관없는, 그러나 언제든 내키면 방문해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