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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 돼지 Aug 20. 2017

영으로 나누면 - 당신 인생의 이야기 (1991)

칼세이건과 알랭드보통 소설을 동시에 읽는 듯한 지적 쾌감

이 책은 SF 소설계의 거장 테드 창(Ted Chiang, 1967년생)이 1991년 발표한 단편 소설집입니다. 이 소설집은 각각 단편으로 발표한 여러 하드 SF 단편 소설들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한 편 한 편이 모두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 깊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문학 소설 수준의 진한 감동까지 있어서, 이 책은 그야말로 SF 걸작 모음집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국내에서는 이 소설집에 포함된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 Arrival>가 2017년에 개봉되어 책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집에 포함된 모든 단편이 SF 걸작이고 특히 그 중 최고의 작품을 한 편 고르라면 물론 저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꼽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미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만큼 이번엔 이 책에 포함된 또 다른 걸작 단편, 짧지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영으로 나누면>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어떤 수를 0으로 나눠도 그 값이 무한대가 되는 경우는 없다. 나눗셈은 곱셈의 역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수를 0으로 나누고 그다음 0을 곱하면 처음 수를 다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한대에 0을 곱하면 0이 되지 다른 수가 되지는 않는다. 0을 곱해서 0이외의 값을 얻을 수 있는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수를 0으로 나눈 결과는 글자 그대로 '무정의(無定義)'인 것이다.

1은 2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잘 알려진 '증명'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런 정의로 시작된다. "a=1, b=1이라고 하자." 그리고 a=2a, 즉 1은 2라는 결론으로 끝난다. 증명 과정 중간쯤 눈에 안 띄게 숨어 있는 것은 0으로 나누기이다. 그 시점에서 이 증명은 벼랑 너머로 한 발을 내딛으며 모든 법칙을 무효로 만들어버린다. 


이 단편 소설은 유능한 수학자인 아내 르네 그리고 그의 생물학자 남편 칼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르네는 1=2 임을 수학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오로지 수학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세상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수학의 수론 체계임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온 르네에게 이 사건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부정할만큼 엄청난 사건입니다. 결국 이 소설은 자신의 신념이 부정당함으로써 자기 파괴를 겪으며 붕괴하는 한 여자와 그런 여자의 모습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애써 부정해왔던 진실을 인정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앞의 인용구에서 소개된 내용이 소설의 SF 부분의 배경이 되는 1=2를 증명하는데 개입하는 수학적 무정의, 즉 0으로 나누는 과정에 얽힌 모순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르네 같은 유능한 과학자가 이런 사소한 실수를 통해 그런 엄청난 결과를 도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그런 증명이 맞냐 틀리냐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으며 중요한 부분도 아닙니다). 다만 저자는 '수학적 무정의'를 통해 증명되는 것으로 알려진 1=2 라는 모순이 참이 되어버린 세상을 상상하여 이를 인간관계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이 절대적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내면의 감춰진 세계는 소통의 단절과 집착을 통해 오랜 시간 다져진 뚝의 제방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이 믿고 있던 이 세계가 무너지는 상황이 벼락처럼 찾아와 뚝을 허물고 물이 넘치게 되면 이런 세계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이 혼돈으로 덮히고 그 세계는 빠르게 붕괴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세상이 견고하고 오래 부식되었을 수록 그 붕괴에 따른 혼란은 크기 마련입니다.


반면 한 세상의 붕괴는 다른 세상의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르네의 자기 파괴가 진행되는 동안 칼은 내면의 목소리에서 잊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세계의 붕괴가 다른 세계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생의 모순. 저자는 이런 모순마져도 수학을 빌어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완전한 것으로 믿어왔던 수학의 언어마저 믿을 수 없게된 세상. 그런 세상을 상상한 소설은 지금 우리들에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소통과 이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요.

 

힐베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수학적 사고에 결함이 있다면 우리는 진실과 확신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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