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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호 Feb 05. 2022

"크래프톤 웨이"를 읽고

연휴를 맞아 크래프톤 웨이를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스타트업에 가고 싶기도 했고,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분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떠올리며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 스타트업에 갔던 나의 어린 시절이 돌아오지 않겠구나 싶기도 했다.

회사 이야기를 하는 책에는 항상 그 회사를 위한 포장이나 책을 쓴 사람들의 개인적인 생각이 강하게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마크 랜돌프의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넷플릭스의 공동 창업자였던 마크 랜돌프 입장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책을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려웠다. 회사 이야기를 담은 책 중에 “크래프톤 웨이"가 유독 좋았던 이유는 이 회사의 역사를 남길 외부인인 저자를 찾아 진행했고, 저자는 회사 사람 여러 사람을 인터뷰해서 이야기를 적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힘든 시기를 겪은 김강석 전 대표의 회사 이메일을 통째로 저자에게 공유했다고 하니... 여기 담겨 있는 것이 정말 블루홀의 역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책을 끊어서 보기 힘들 정도로 몰입감 있었고, 블루홀의 힘든 시기가 그려져서 읽기 힘든 페이지들도 있었다.

이 책을 다시 보고 싶을 나를 위해 몇 군데 옮겨둔다. 


p31. 그라운드 제로: 신화의 시작

김강석이 어떤 사람을 철부지라 부를 때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꿈은 큰데 자기 위치를 모르거나, 시장에 대해 허황된 생각을 품고 있거나, 취미와 직업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박용현이 이끄는 팀은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이들은 엔씨소프트에서 게임을 성공시켜본 프로 중의 프로로 보였다. 무엇보다 대화가 가능했다. 이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뚜렷한 근거를 들어 설득력 있게 말했다. “우리만 믿어달라"는 공수표를 날리지 않았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하는 오만도 없었다. 김강석이 말을 이었다. “저런 사람들이라면 누군가 오류를 비판했을 때 수정하고 교정할 수 있겠어요. 프로들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을 프로라 부를 때에도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장르 전문성과 소통 능력, 그리고 열린 자세를 갖춘 사람을 프로로 인정했다. ... 김강석에게 게임 제작을 이끄는 리더들은 게임에 파묻혀 사는 마이나이면서 동시에 열린 사람이어야 했다. 이런 상반된 자질을 구현할 수 있어야 적어도 게임의 성공을 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박용현팀은 이런 모순적인 속성이 잘 반죽돼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p77. 플레이어 입장: ID 블루홀 스튜디오 
그(장병규)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일 잘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나아가서 자신의 이익보다 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블루홀에 필요한 인재는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했다. 경험한 만큼만 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소통하려는 자세를 갖춘 지식 근로자를 최대한 블루홀에 품고 싶었다. 


p94. 장병규의 메시지 #2, 의사결정에 대하여
경영자의 주요 역할과 책임은 의사결정 그 자체다. 합리적 추론, 이성적 토론, 과학적 판단, 다수결 등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의사결정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고유한 권한으로 입체적 관점에서 소신과 직관을 동반한 주체적 판단이며, 경영자는 자신의 판단을 말로써 설명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성과와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필요한 경우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 라스트맨인데 고독하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권한과 보상을 누리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조직 내에서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면, 보닌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이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p156. 버그 발생: 게임 안팍의 에러들 

장병규와 김강석은 게임 제작을 경험하지 못한 햇병아리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블루홀에서 기한을 넘긴 제작은 곧 실패와 동의어였다.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온 타임 온 버짓'이란 구호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아무도 '경영과 제작의 분리' 원칙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장병규와 김강석은 블루홀의 정체성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답을 내진 못했다. 다만 'MMORPG의 명가'라는 비전은 남아 있었다. 적어도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선 제작과 경영의 분리라는 대원칙의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어떤 제작사가 좋은 제작사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생각나는 대답 몇 개를 노트에 일단 끄적였다. '훌륭한 제작은 제작과 비제작, 경영 사업 등 여러 가지 영역들이 훨씬 더 유기적이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더욱 솔직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어야 한다' '영역을 자꾸 나누고 있는 게 문제. 그러다 보니 진짜 문제가 터졌다'
김강석은 '컨트롤'이란 단어를 쓰고서는, 그 위로 엑스 표시를 했다. 경영이 제작을 조종할 필요도 없고, 조종해서도 안 된다. 제작을 억압하면 창의성은 말살된다. 

그는 그 대신 '유기적 팀플레이'란 단어를 썼다. 제작은 더 이상 블루홀에서 신성 불가침한 성소가 아니었다. 이제 경영진 그 누구도 "제작은 제작이 알아서 하니 믿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김강석은 "제작도 이제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p227. 투지의 전장: 블루홀 2.0 

희망퇴직과 흔들리는 수익으로 경영진의 감정은 날카로워졌다. 장병규는 경영진 회의에서 볼펜을 내던지고 욕설을 뱉기도 했다. 이어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는 메일을 보냈다. 

우선 공식적인 회의에서 욕을 해서 죄송해요. 감정이 많이 상했을 것이 분명한데,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 다시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죄송한 일이나, 앞으로도 필요하면 욕을 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일모도원(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하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조직은 죽은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나요. 일단 살아야 인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병규에게 품격이란 일단 생존한 다음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헐떡이는 숨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우선 살아야 했다. 


p412. 생존게임: 자금압박과 영토 확장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소망을 이야기한다면, 경영진과 제작진이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막힘없이 토론하고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러나 합의된 결론을 향해 한마음으로 달리는 회사. 제작의 리더쉽과 실무진이 신뢰와 존중으로 팀을 이루어, 떄로는 시장의 트렌드를 빠르게 따라잡는 프로젝트를, 때로는 세상에 쉽게 나오지 않을 독특한 아이디어를 과감히 프로젝트로 만드는 회사. 실패한 팀에 손가락질하지 않고, 성공한 팀이 그렇지 않은 팀을 무시하지 않는, 성공과 실패 모두에 겸허하게 열려 있는 회사. 
위와 같은 조직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기술이나 사업모델이나 전략보다는 이런 문화 자체가 세계적인 게임 명가로 가는데 더 없이 귀한 자산이며 경쟁력임을 알고 있는 회사, 그런 회사가 되면 참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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