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생활기록부라고 하나.. 엄마 유품 정리하다가 오래된 나의 국민학교시절 통신표를 발견했다.
성적이 어쩌다 우 하나 미 풍년에 양가 집 규수 신세였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세월에 번진 만년필 글자 사이로 선명히 보이는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는 선생님의 나에 대한 평가를 보고 두 번 놀랬다.
처음엔 이 평가 자체에 놀랐다. 글자를 어찌나 크게 쓰셨던지..
내가 그랬단다. 참으로 초3학년 아이에게 너무나 가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그 어린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가혹한 평가를 하실 수 있었을까.. 아이는 무생물 인줄 알았나보다 아니 나는 그 당시 무생물이었을것이다. 요즘엔 대놓고 생활기록부에 이런 평가를 하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두번째는 이런 평가를 받은 이 날, 성적표를 들고 읽다가 귀까지 빨개진 어린 내가 떠올라서 놀랐다. 세상에 기댈 곳이 하나도 없다는 무너진 마음을 느끼는 아이가 고스란히 내안에서 살아났다.
고아원에서 남자아이를 데려오려다 실수로 여자아이가 오는 바람에 갑자기 함께 살게 된 마릴라 아줌마와 빨강머리앤. 앤 처럼 나도 말이라도 속시원히 하고 싶은 충동이 갑자기 올라온다.
린든 아줌마 : ‘비쩍마른 말라깽이에 얼굴이 정말 못생겼군요.. 이리 와서 나에게 그 얼굴을 똑똑히 보여다오, 어머나 게다가 주근깨투성이에 머리는 또 왜 빨갛지? 마치 홍당무 같잖아. 자자 어서 이리오너라..
앤 : 아줌마 같은 사람은 얼굴도 보기 싫어요. 싫어요 .딱 질색이라구요. 날 보고 삐쩍 마른 말라깽이에 얼굴이 못 생겼다고 했죠? 주근깨투성이에 머리는 홍당무 같다고 했죠? 아주머니 같이 야비하고 무례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남을 그렇게까지 말 할 수 있어요? 만일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마음이 어떨 것 같으세요? 너무 너무 뚱뚱해서 볼 품이 없고, 상상력은 한 조각도 없어 보인다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이말을 듣고 아주머니가 기분이 나빠도 나는 상관이 없다구요 당연히 기분나쁘셔야죠..저는 잔뜩 술에 취한 토마스 아저씨가 무척 미웠을 때 보다도 훨씬 아주머니가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어디 두고보세요..용서하지 않을거에요..’
린든: 아 이렇게 지독하게 화를 내는 계집애는 첨 봤어
마릴라 : 앤~ 너는 네 방에 가 있거라. 내가 갈 때까지 방에서 나오면 안돼..
…..
앤:내가 아무리 못생기고 빨강머리라고 해도 그 아줌마가 그렇게 말할 권리는 없어요..
마릴라: 너에게도 그렇게 버럭 화를 내거나 버릇없게 말 할 권리는 없어요… 네 자신도 늘 그렇게 말해 왔잖아.
앤: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과 남 한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달라요ㅜㅜ
앤의 말은 너무 맞는 말이다. 내가 나 자신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 한테 그런 소릴 듣는 것은 다르다.
학교에서 주의가 산만하고 친구들과 잘 다투던 나는 아마도 소아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소아우울증의 증상은 어른들과 달리 마치 ADHD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산만하다. 때로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공격적이 되니 아이들과 잘 싸운다. ‘어머니의 정서적 학대와 방임 및 아동의 자기조절 능력이 아동의 우울성향에 미치는 영향’ (조옥자,2005)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의하면 어머니의 정서적 학대와 방임이 높을수록 아동의 우울성향이 높게 나타났는데 이러한 결과는 학대로 인해 왜곡된 정서상태가 내면화 되어 우울/불안, 위축 및 애착 장애등이 나타난다고 보고한다.
내 자녀가 통신표에 그런 평가를 받아왔다면, 요즘 부모라면 '왜 OO이가 학교에서 주의가 산만하며 친구들과 싸울까?' 하고 궁금해 져야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민감한 반응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겐 그런 경험이 없다. 이것은 세대간 정신화 실패로 보여진다. 부모가 스스로를 조절하거나 적응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때 자녀에게 적대적이거나 무기력한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부모가 적대적이 될 때는 자녀의 정서를 억압하고 소리를 지르며, 무기력할 때엔 분리와 철수 반응을 한다. 이런 부모의 행동을 자녀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아이의 마음에 내면화되면 왜곡된 정서상태가 대물림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엄마는 그 통신표를 왜 그때까지도 버리지 않고 앨범에 끼워 놓았던 걸까... 이젠 나도 못 버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