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인 직업을 가진 전문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영국의 잡지 <모노클 Monocle>.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디자인, 패션 등 그야말로 방대한 주제를 다루는 잡지인데, 주제의 범위가 놀랄 정도로 넓은 데다가 심도 깊은 취재와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유명합니다. 읽다가 살짝 기죽을 정도로요. 그러다 보니, 막상 읽어 본 사람도 많지 않다는 모노클. 말하자면 무슨 주제가 튀어나와도 대화에 끼어드는 똑똑이 친구 같은 잡지가 모노클입니다.
이런 모노클이 '살기 좋은 도시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매년 여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톱 25>라는 랭킹을 발표하는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잡지가 도시를 선정하는 기준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좋은 도시의 지표들이라 생각했던 상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잣대를 들고 나오거든요. 보편적인 좋은 도시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주택보급률, 가계소득, 교통 인프라, 녹지 면적, 낮은 범죄율 같은 것들이겠지만, 모노클은 조금 다른 시각을 더해서 살기 좋은 도시를 평가합니다.
예를 들자면, '자전거 출퇴근 비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출퇴근하는 인구 중 몇 명이 자전거를 이용하는지 세보는 것입니다. 코펜하겐이 45%로 단연 상위권인데, 사장님부터 신입 사원까지, 10명 중 4-5명은 자전거를 타고 직장을 간다는 얘기니, 놀라운 수치입니다. 공공 자전거 대수라던가, 자전거 도로 길이 같은 데이터보다 손에 잡힐 듯, 생활과 밀접한 통계라 할 수 있겠죠. 월요일 아침, 코펜하겐의 출근길은 건강미 넘치는 매력 풍경일 것 같습니다.
'괜찮은 점심을 먹는데 드는 비용'이라는 독특한 기준도 있습니다. 괜찮은 점심이라는 말은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모두 다르게 느끼는 것일 텐데 너무 주관적인 기준이 아닐까 의심이 갑니다. 이런 통계를 내는 것부터가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좋게 생각하면 넷이서 같이 밥 먹고 나오면서, '야, 오늘 점심 괜찮았어'라는 말이 적어도 세 명 정도 입에서 나오는 식당이라 생각하면 의외로 통계화하기 쉬울 것 같기도 합니다. 깔끔한 우동+돈가스 세트에 마무리로 작은 과일 푸딩이 나오는 식당이라면 '괜찮다'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여하튼 이런 말이 나오게 만드는 식당이 많이 있는 도시에 산다면 행복지수가 상승할 것 같습니다. 모노클의 조사에 따르면 비엔나의 괜찮은 점심 가격은 15유로. 반면 후쿠오카는 4유로로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후쿠오카의 직장인들이 부럽습니다.
'나이트클럽 문을 닫는 시간' 랭킹도 있습니다. 물론 늦게 까지 여는 도시가 랭킹이 높겠죠. 미국 포틀랜드가 새벽 2시인데 반해서 도쿄는 새벽 5시. 이 랭킹이라면 서울도 자신 있습니다. 아침 7시까지 여는 클럽이 있다고 하니까요. 이 분야의 최고 강자는 베를린인데, 24시간 클럽이 있습니다. 포틀랜드 보다는 베를린 젊은이들의 밤이 행복할 것 같네요.
'예술가의 주거비용 지수'라는 것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재능은 있지만 아직 가난한 예술가라면 어느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을까요? 이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천장이 높은 작업실이 필요한데, 이런 멋진 공간을 사용하는 비용이 저렴해야만 마음 놓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랭킹에서도 단연 베를린이 앞서 있습니다. 도심의 예술가용 스튜디오가 제곱미터당 4-5유로.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가고 싶겠군요.
모노클은 도시에 있는 스타벅스 개수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스타벅스가 도시에 많으면 많을수록 도시 매력 점수가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도시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요소니까요. 베를린이 여전히 우수. 23개.
반대로, 독립서점은 많으면 많을수록 점수가 올라갑니다. 코펜하겐이 52개, 뮌헨은 140개. 와! 도쿄는 무려 1300개의 독립서점이 있다니, 덕분에 도시 랭킹이 쭉쭉 올라갔습니다. 심지어 '강아지 환영 지수'도 있으니 말 다했죠. 강아지에게 친근한 도시가 좋은 도시입니다. 도시에 개 전용 공원이 있다면 득점.
조금은 농담 같은 이런 연구를, 똑똑이 모노클은 왜 하는 걸까요?
가계소득, 주택 보급률, 교육 시설, 건강 같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 사람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밤늦게 까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뒷골목 식당, 내 강아지가 행복해하는 작은 공원의 풀밭, 친절한 주인이 말을 걸어주는 아늑한 술집. 이런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이 도시의 매력을 높이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재미를 원하는 관광객, 작업할 곳을 찾는 예술가, 일과 놀이의 즐거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글로벌 인재들은 자신이 가진 삶의 가치를 받아줄 매력 도시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이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잣대로 도시의 매력을 평가합니다. 미술관과 클럽이 밤늦게까지 문을 열어 둘까? 출퇴근할 때 러닝을 하고 싶은데? 집 근처에 편안한 바 정도는 있어야지. 그동안 딱딱한 통계는 잡아내지 못했던 일상의 다양하고 소소한 요구들이 도시 매력의 핵심이라는 점을 모노클은 간파한 겁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도시는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게 최고입니다. 인구 밀도가 어느 정도 높아야 경제가 움직이고, 고층 건물들도 좀 솟아 있어야 일하기 효율적입니다. 이런 규모와 효율이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당기는 가장 중요한 동인입니다.
다만 이런 효율성을 너무 앞세우다 보면 다양함이 저해되기 쉽습니다. 아파트는 동일한 모양으로 지어야 효율적이지만, 그 대신 다양함은 최소화되어야 합니다. 공원은 대규모로 한 곳에 몰아서 만들어야 비용이 절약됩니다. 그러니 동네 한편에 강아지 전용 소공원을 만들 여력은 없습니다. 효율적 생각을 가진 도시들은 살만하긴 하겠지만,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다양함의 효율,
현대 도시 매력의 핵심
모노클이 주장하는 도시 매력을 요약하자면 '다양함의 효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침에 가족들과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신나게 몰고 출근. 회사에 마련된 샤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사무실에서 미팅을 하고, 저렴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나갑니다. 숲길을 걸어서 회사로 돌아왔다가, 퇴근길에는 작은 책방에 들러 책 몇 권을 사고 집 앞 모퉁이의 아늑한 바에서 동네 사람들이랑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침대로 들어가 책 몇 페이지를 읽다가 잠이 듭니다.
이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도시라면 다양한 삶을 담아낼 장소가 곳곳에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도시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효율이 다양함을 저해하지도 않았고, 다양함만 찾다가 효율이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다양함의 효율을 가진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주택 보급률 뿐 아니라, 나이트클럽이 문 닫는 시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도시의 맥주/생수 가격비'라는 것을 얘기했는데, 이제는 사소하지만 삶과 맞닿아 있는 요소들이 도시에 애정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노클은 도시 랭킹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괜찮은 점심 값이 얼마인지 말해줘. 그럼, 당신의 매력 지수를 알려줄게'라고. [매력도시연구소]
* 이 글은 부천 문화재단 정책 웹진 <10000>에 게재한 내용을 매력도시 매거진에 맞추어 수정한 것입니다.
Reference
QUALITY OF LIFE SURVEY: METROPOLIS NOW, 모노클 +
부천 문화재단 정책 웹진 <10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