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 Day. 9 자정
타이완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호텔로 돌아와 넋을 놓고 있다가 호텔 근처에 가보고 싶었던 바가 있다는 걸 깨닫고 닫기 전에 서둘러 걸어왔다. 컨템포러리 갤러리 바로 앞에 있었다. 구글 리뷰를 보니 주인장이 엄청난 롱 아일랜드 아이스 티를 만든다기에 중간 레벨의 알코올 농도로 주문했다. 크아.
한 입 마시고 감탄사를 내뱉자 알콜 더 필요하냐며 더 세게 만들어줄까 하고 물었다. 나는 전 세계 어딜 내놔도 술 잘 마시게 생긴 얼굴인가 보다. 누구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이 바의 이름은 Starry Night. 바 벽에 당연한 말이지만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다.
대만 사람들은 고양이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다. 기다란 바에는 고양이 피규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까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동네 길고양이와 놀아주는 소녀가 있었다. 정말로 맑고 해사한 얼굴을 가진 예쁜 소녀였다. 화장 같은 건 하지 않았고. 고양이가 너무 귀여웠는지 이 더운데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고양이 엉덩이를 토닥여줬다. 그 모습이 예뻐서 반경 일 미터 거리에서 부처님 미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었더니 날 보고 수줍게 웃었다. 소녀도 고양이도 이 도시에서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존재들이었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집단적으로 발작을 일으킬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었다. 고양이란 무엇인가.
남자 바텐더이자 사장님의 이름은 촤이. 아주 예쁜 직원의 이름은 제시카. 대화를 나누다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아는 중국어는 샤오제, 마이딴 이 정도라고 하니까 '샤오제'라고 하면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라고 알려줬다. 술집 아가씨 정도의 의미인 것 같았다. 아니 옛날에 북경에서 눈 파란 애들이 식당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북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상해나 쓰촨성 이런 데서는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타이베이는 괜찮지만. 아니 그러면 너는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물어봤더니 중국 본토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나는 한국인입니다, 라는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배웠다. 갑자기 궁금한 점이 생겨 촤이에게 물어봤다. 난 대체 어떻게 보이는 얼굴인가?
"제가 아까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혹시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요, 외국 태생의 대만인인줄 알았죠."
"엥, 왜요? 제 영어 발음은 그정도로 유창하지 않은데요?"
"뭐 어쨌든 저보다는 잘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냥 내가 대륙의 기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어디를 봐도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대륙의 여인인 것이다. 이건 또 누구한테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집안 여자들은 내가 봐도 북방 민족의 기운을 타고났다. 다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 기골이 장대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나도 여리여리 핏이 어울리는 여자이고 싶었는데 이제 그런 건 그만 포기하도록 하자.
대만 사람들은 술보다 차를 훨씬 더 좋아하는 거 같애, 어딜 봐도 술집보다는 찻집이 많은 것 같어, 하고 운을 띄우니까 이 동네는 그렇지만 둥취 같은 지역은 술집이 엄청나다고 했다. 대만 사람들은 주말에 주로 술을 마신다고. 아 한국 사람들은 에브리데이 술판이여, 했더니 아주 좋은 풍습이라며 극찬했다. 아니여 그건 아녀... 그리고 대만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에 대해 물어봤다. 뉴러우미엔(우육면이다)과 루러우판을 먹고 감탄했다고 하니까 그들도 함께 감동했다. 우육면은 정말 최고시다.
내일은 시립 미술관에 가기로 다시 마음을 바꿨다. 이지 카드에 아직도 두 번 정도 왕복할 만한 금액이 남아있다. 내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즐겁게 소비하고 싶다. 여행을 시작할 때 두툼했던 약 봉지가 아주 가벼워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또다시 여행을 준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