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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23. 2019

완벽한 밤

6/27 Day. 9  오후 7시 

Ivy Palace 의 카페에 앉아서 쓰다.      


어제 결심한대로 이제 더 이상 관광객만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가지 않겠다 다짐하고 아이비 팰리스에 왔다. 처음에 밥을 먹으려고 했던 할랄 푸드 식당은 가격이 더럽게 비싸서 패쓰했다. 어차피 술도 안 파는데 뭐 하러 가나 안 가도 되지... 구글맵이 디화제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하기에 그러면 지안 샨 호텔 근처의 대만식 덮밥인 ‘루러우판’ 식당을 들를 수 있겠다 싶었다. 지하철 역에서 찾아가보니 닝샤 야시장 완전 초입에 있었다. 밥을 먹으러 도착한 시간은 4시 정도. 밥을 먹기에는 가장 애매한 시간이며 손님이 아무도 없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메뉴인 돼지고기 루러우판과 대만식 소세지인 상창을 먹었다. 털보 주인 아저씨의 얼굴이 떡하니 프린트된 몸에 건강한 느낌의 음료수도 마셨다. 정말 저렴한 가격에 간단하게 한 끼 해결하기 좋았다.      


밥도 먹고 기분도 좋아졌겠다 또 비도 그쳤겠다. 아이비 팰리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서 20분 남짓한 거리. 살면서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걸어 다녔다. 오늘은 아이패드를 가져 와서 배낭도 매고 왔고 이어폰도 챙겼다. 가는 길도 매우 단순했다. 하염없이 직선으로 가다가 지하철 역을 만나면 오른 쪽으로 돌아서 또 쭉 걸어가면 되었다.      


늘 그랬듯이 나는 동남아시아의 날씨를 우습게 보는 오류를 저질렀다. 오늘 습도는 82% 가만히 있으면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가습기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MBC 다큐 아마존의 눈물 담당 피디는 남미의 더위를 이렇게 묘사했다.      


“브라질 공항에 내리는 순간 누가 헤어 드라이기를 입에다 대고 바람을 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호텔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펄펄 끓는 가습기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온도는 30도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너무 습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두 팔을 흔들며 씩씩하게 목적지로 향했다.      


겨우 도착하니 고즈넉한 풍경이 아름다운 아주 고풍스런 아케이드가 있었다. 대략 100년 전 대만의 건축 양식으로 디자인 한 공간 같았다. 아직 관광객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구경하는 사람들도 적당했다. 저녁에는 공연도 한다고. 주로 일본인 관광객이 많고 대만 현지 사람들이 데이트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공간인 것 같다. 지금 들어와 있는 ‘모던 무드 앤 모던 무드’ 카페(왜 두 번 반복하는 상호명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커피가 너무 비싸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심지어 여기 와서 마셨던 커피 중에 가장 맛있다. 단순히 더위에 지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니고 내 취향에 맞는 아주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줬다. 숨을 몰아쉬며 얼음 좀 팍팍 넣어 달라고 하니까 알바생이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었다. 내일 또 오고 싶은 생각이 들면 무조건 우버를 타리.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더 차린 다음 페소아를 읽다가 아케이드의 다른 상점들도 구경하고 조이네 바로 떠나야겠다. 이곳의 대부분의 식당과 카페가 오후 8시 경이면 닫는다고 나와 있다. 더 늦게까지 하는 곳은 술집 정도인 듯. 아까 열심히 걸어오다가 블래키와 정말로 똑같이 생긴 개를 봤다. 블래키가 아닌가 싶었는데 다리 4개가 온전히 있었다. 어렸을 때 헤어진 형제인가 싶을 정도였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기에 나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개는 잠시 내 다리에 코를 대고 킁킁대며 호구조사를 하더니 내가 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다소곳이 앉았다. 순하고 착한 예쁜 아이였다. 길에서 만나는 강아지, 고양이들이 별 걱정이 없어 보이는 도시에서 평생 살고 싶다.      


배고픈 상태에서 술 마시면 또 폭음할 것 같아 주변에 멀쩡해 보이는 식당 아무데나 들어가서 우육면을 먹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이 근방에서 굉장히 유명한 우육면 전문 식당이었다. 가격은 아주 싸지는 않았으나 그에 걸맞게 국물이 어마어마했다. 우육면이란 음식은 해장에 살벌할 정도로 알맞는 음식이었다. 우육면 창시자님 감사합니다. 사람 여럿 살리셨어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조이네 바에 갔는데 조이가 없다... 블래키도 없고. 낯선 바텐더가 있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앞에 있는 바에서 타이완 크래프트 비어를 마셨다. 상큼한 끝맛이 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가 터질 것 같다. 우육면은 괜히 먹었지. 실컷 잘만 먹어놓고 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이제 돈이 37,000원 가량 남았다. 이걸로 토요일까지 대강 간단하게 밥과 커피를 해결해야 한다. 물론 카드 결제가 가능한 비싼 식당에 가서 비싼 음식을 시켜먹으면 된다. 근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조이와 메이 주려고 가져온 저 펑리수는 어쩔 것인가. 내가 돈 없어서 밥 못 먹을 때 먹어야 하는 것인가. 당 떨어질 걱정은 없겠네.  

    

아까 들러본 아이비 팰리스는 관광객들이 굳이 찾아오기에는 거리가 멀고 교통이 애매하다. 쿨하고 힙한 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그런 곳이지만 타이베이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굉장히 조용하다. 아까 그 거리에서 한국인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대만 여행 카페에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내일도 다시 와서 오늘 보지 못한 곳을 더 들여다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바는 특이하게도 CNN 뉴스를 틀어준다. 일본 오사카에서 G20 회담이 개최되고 있었다. 지금은 피파 여자 월드컵 8강전이 한창이다. 여자 축구 선수들은 정말로 터프하다. 몸싸움 때문에 상처가 나도 얼굴 가득 흐르는 피를 퉤! 뱉어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플레이를 이어간다. 그것에 비하면 요즘 남자 축구 선수들은 엉덩이를 뻥뻥 걷어차 주고 싶을 정도로 엄살이 많다. 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이해하도록 하자. 


땀을 한 바가지 흘렸더니 쉬고 싶었다. 근처 큰길에서 우버를 기다리는데 정겨운 광경을 봤다. 건물 한 쪽에 스크린을 걸어놓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영화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다같이 흰 티셔츠를 맞춰 입은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조심조심 춤을 추고 있었다. 


완벽한 타이베이의 여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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