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 Day. 8 오후 10시
돌아오는 길에 전국 펑리수 대회에서 1등했다는 순청 베이커리에서 펑리수 한 상자를 샀다. 내일 다시 사케 바에 갈 생각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뭐라도 가져가야지 싶었다. 그런데 대만인에게 펑리수를 먹으라고 주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 고추장과 비빕밥과 김치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혹은 양갱? 사실 먹으라고 준 김에 나도 한 입 먹어보고 싶어서 산 거다. 난 지난 대만 여행에서 펑리수를 몇 상자를 사다 선물로 돌렸어도 정작 한 개도 먹어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다는 치아더 펑리수를 출국 날 공항에서 픽업할 수 있게 미리 사뒀는데, 일단 내 거 한 상자는 빼놨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도 구매해서 3일 만에 받을 수 있다고... 이럴 거였으면 금요일에 여기서 주문하면 월요일에 내 집으로 받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정말 세상이 좋아지긴 한 거 같다.
이제 내게 남아있는 대만 달러가 정말 조금이라 전략적으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타이베이 도심에서 일본식 음식을 조리하는 식당은 모퉁이마다 하나 씩 찾을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흔한 것은 라멘이다. 나는 일본 라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특유의 강하고 무겁고 진한 국물이 부담스럽다. 라면은 역시 너구리 얼큰한 맛이지. 신라면을 좋아한다는 조이한테 노노, 자기야. 그거 말고 진짜 레알 한국 라면이 있답니다. 그것은 영어로 라쿤이라고 불리지. 아니 어째서 라면 이름이 그러냐고 눈이 똥그래져서 물어봤다. 그건 나도 당연히 모르지만 너구리 얼큰한 맛은 진짜 죽여. 마트에서 찾으면 꼭 사먹어 보도록 해요. 외국인에게 너구리를 전파하다니 어찌나 뿌듯하든지.
라멘 다음으로 많은 식당은 일본식 덮밥을 파는 곳이다. 호텔 바로 옆에 일본식 덮밥 프랜차이즈인 ‘스키야’가 있었다. 건너편에는 ‘요시노야’가 있었는데 여기는 도대체 메뉴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갔다가 나왔다. '스키야'에서 가장 무난한 메뉴로 단박에 주문을 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직원이 합석을 해도 괜찮겠냐고 했다. 나는 5초 정도 고민했다. 내가 그녀의 영어를 못 알아들은 줄 알았는지 재차 물어봤다. 2초 고민하고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고 했다. 어제 팀호완에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홀로 딤섬을 먹은 것 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렇게 작은 테이블에서 생전 처음 보는 대만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고 모른 척하며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혼자 식당에 앉아 꿋꿋하게 밥을 먹는 것도 서른다섯 인생에 이번 여름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합석을 힘들어하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생판 모르는 남과 잘만 같이 먹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작고 회전율이 높은 식당에서는 무조건 테이크아웃을 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기에 음식이 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 얼른 나왔다. 심지어 아사히 맥주도 남겼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약간 허전해서(엄청 먹어놓고는) 호텔 옆에 노점에서 치킨 1인분을 팔기에 포장해서 타이완 맥주와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기는커녕 배가 터질 것 같아 알콜도수를 봤더니 5프로도 되지 않았다. 욕을 욕을 하면서 버렸다. 타이완 맥주 실망이야.
오늘이 타이베이에 도착해서 두 번째로 흥겨운 날이다. 가장 보고 싶고 가고 싶은 데를 다녔더니 진짜 남의 나라에 놀러온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전형적인 관광객 코스를 다닐까 했었다. 여기 왔는데, 그래도 그림에 관심이 있는데, 필수 코스라는 고궁박물관도 안 갈건데, 시립 미술관이라도 가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혼자 돌아다녀 본 결과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일은 한국의 그 어느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곳을 가려고 한다. 구글 맵에서 아주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이리저리 구경하다 지치면 커피 마시면서 페소아 책 읽을 예정이다. 내일 갔다가 좋은 인상을 받으면 금요일에도 또 가 볼 생각이다. 저녁 먹을 곳과 커피를 마실 곳도 벌써 다 정해놨다. 내일 태어나 처음으로 할랄 푸드를 먹을 것이다. 매우 기대가 된다.
호텔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맹인안내견과 그의 주인을 봤다.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에 바닥에 딱 붙어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눈만 껌뻑이며 고요히 앉아있는 그 개가 참 영특하고 기특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내릴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사람들도 안내견이 있는 걸 보고는 혹시나 발을 밟을까봐 조심조심 걸음을 뗐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아주 멋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