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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23. 2019

양키는 인간의 탈을 쓴 승냥이다

6/26 Day. 8 오후 5시 

드디어 그놈의 마라우육면을 먹으러 왔다. 아예 오픈하자마자 오거나 늦게 오거나 하긴 해야 한다. ‘마선당’이 아주 유명한가 보다. 사람이 정말 많다.      


하루 식비를 정하고 나니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이따 저녁엔 호텔 옆 푸드코트에서 가장 저렴한 덮밥을 먹겠노라 다짐했다. 먹는 것에 사치를 부리지 않는 편인데 타이베이는 미식가들의 도시라 그런지 조금만 넋을 놓으면 마구 먹게 된다. 무서운 사람들 같으니.     


베를린에서 써야하는 생활비를 생각해보니 또 한숨이 나왔다. 뭐해 먹고 살 것인가.      


타이베이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들이 무난한 것 같다. 이렇게 덥고 습한데도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 싸우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이 나라에도 불쾌지수라는 단어가 있나? 방콕에 비해 표정은 풍부하지는 않지만(한국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고 또 츤데레는 아닌 것 같고. 감정 기복이 많이 없고 뭐 그러려니, 좋은 게 좋은거지... 하는 느낌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만 유독 인기있는 식당은 서비스에 대한 혹평을 하는 리뷰가 많은데, 그 외 유명하다는 보통의 맛집들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 가이드북에 나온 식당이나 카페를 한 번 가볼까 싶다가도 이 더위에 한국 사람들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맛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음식을 비싼 돈을 내고 먹을 생각을 하니 시도할 가치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럴거면 술을 한 잔 더 마시지. 가이드북과 여행 프로그램이 유용하긴 하다. 그런 식당을 피할 수 있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켜준다.      


드디어 마라우육면과 하카우를 먹었다. 태어나 딱 한 번 먹어봤던 마라의 맛. 향이 너무 강해서 입도 대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선지까지 다 골라서 싹싹 비웠다. 하카우 딤섬까지 시켰더니 세트 메뉴가 되어서 내 앞에 거하게 한 상 떡하니 차려졌다. 옆에 앉은 두 모녀가 그 싸이즈를 보고 헉 했다. 날 보고도 은근 놀라는 눈치였다. 저 여자가 저걸 혼자 다 먹겠다고? 저기, 저도 이렇게 크게 나올 줄 몰랐어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즉, 약간 데면데면한 표정을 지어주며(사실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뭔가 그런 걸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한 모금 마신 국물은 생각보다 향이 강하지 않아 육개장을 먹는 기분이었다. 소 내장 같은 고기도 가득 들어있었고 무엇보다 선지가 굉장히 부드러워서 놀랐다. 생긴 건 아무리 봐도 선지가 맞는데 식감이 내가 알던 그게 아니네? 다른 테이블을 보니 마라우육면과 함께 불판에 지글지글 구운 만두를 먹고 있었다. 대만 먹거리 특집(!) 책에서는 그 메뉴 말고 다른 만두 설명이 있었는데 제대로 자료 조사를 한거야 뭐야. 여튼 내일이나 모레에 또 가서 일반 우육면과 지글지글한 만두를 먹어보리라 다짐했다. 대만에 와서 처음으로 이 나라의 풍미가 가득한 한 끼 식사를 했다. 아주 만족했다. 어제와 달리 해가 가득 들었다. 오늘이야말로 즐거운 마음으로 미니어처 박물관에 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오늘 드디어 방문한 미니어처 박물관은 다른 명소들에 비하면 입장료가 꽤 비싼 편이기 때문에 정말로 흥미가 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대부분 미취학 아동과 함께 하는 대만인 엄마들이었다. 아이들은 흥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그 와중에 아주 차분한 표정으로 작품에 비치된 스탬프를 하나하나 스스로 찍는 어린 소년이 한 명 있었다. 너무 의젓하고 진지하게 관람을 해서 혹시 이 아가가 혼자 왔나 싶었다. 물론 엄마가 있었는데, 아이한테 이거 봐라 저거 봐라 도장은 이렇게 찍어라 거기 가지 말고 일로 와라, 이런 식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다른 엄마들은 주로 이렇게 했다). 자기 아들이 어른들과 어울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늘 훈련을 했나 보다. 아주 바람직한 양육 방식으로 보였다. 아이들을 십년 넘게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피곤한 버릇이다.      







'뮤지컬 공연을 다녀온 후'라는 제목의 작품. 깨알같은 아이템들이 귀엽다 


수경 언니를 속인 문제의 그 사진


미니어처 박물관은 뭐랄까, 사람들의 사는 모습 그대로를 아주 작은 공간에 그대로 압축해서 표현해놓은 예술 작품의 향연이었다. 너무 정교하게 재현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걸 하나하나 붙잡고 만들고 있었지? 그 중 압권은 버킹엄 궁전의 한 부분을 재현한 것이었다. 사진을 그럴 듯하게 찍었더니 실제 그 건물 안을 촬영한 느낌이 났다. 수경언니를 속일 수 있겠다 싶어 사진을 보내며 르네상스 풍 회화가 있는 타이베이의 미술관에 왔다고 뻥을 쳤다. 언니는 속았다. 뿌듯했다.      


한 시간 동안 이것저것 천천히 구경을 다 하고 CNN이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VVG Something’ 서점에 갔다. 함께 선정된 나머지 19곳도 궁금했지만 그건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았다. ‘베리베리 굿’이라는 단어의 약자였다. 햇볕도 나고 그렇게까지 뜨겁지 않아 서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무 정보 없이 구글 맵이 보여주는 길로 갔는데 마치 광화문 대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중간 중간 동네 마실 나온 강아지도 함께 걸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세계 어디서나 다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간만에 흥겨울 때는 밀레니엄 초기의 힙합이 최고이기에 CB Mass의 ‘진짜’를 들었다. 정말 힙 터지고 싶을 때 듣는 노래다. 이 노래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는 샘플링한 원곡인 ‘Got to be real’까지 찾아 듣는다. 그 노래는 진정 이 세상 힙이 아니다. 21세기에 힙스터라고 깔짝대는 아가들은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있다. 어제 비가 내렸던 지라 공기에 습기가 조금 가신 것 같았다. 때마침 햇빛도 적당하고. 며칠 만에 접하는 아주 쾌적한 분위기였다. 이번 주는 엄청난 더위 속에 숙소를 옮기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해서 순간순간 굉장히 우울했다. 오후에 한참 산책을 했더니 그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역시 우울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가득 먹고 기운내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어렵지 않게 서점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생각 보다 너무 작아서 놀랐다. 주로 패션과 음식, 디자인에 대한 외서와 일본 서적이 많았다. 대만을 소개하는 그림책(런던에서 샀던 SASEK의 그림책 같은)이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아무리 뒤져도 적당한 것이 없었다. 대신 엄청난 것을 발견했다. 바로 [Made in North Korea 조선]이라는 책이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북한을 방문하여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상에 대해 서술한 책인데, 중간에 아주 골 때리는 표어가 있어서 사진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다 

정말 이 챕터 제목을 보고 빵 터져서 몰래 웃었다. 웃고 나니 그때서야 기력이 떨어져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조용히 서점에서 나왔다. 어느 순간 손님이 나 혼자였고 나는 땀에 절어 있었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메인역으로 바로 가는 지하철 노선이 있어서 총총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6월의 대만 날씨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한국 기상청은 여기에 비하면 제주도 천문대와 나사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월등한 기관이었다. 급한 김에 주변의 상점 아무데나 들어갔다. 우산은 있었지만 쫄딱 맞을 것 같았다. 액세서리와 옷을 파는 가게였는데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고민해도 살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어쩜 내 취향에 정확히 빗겨가는 아이템만 있는지. 점원들이 바쁜 틈을 타 폰 케이스 샵으로 걸음을 옮겼다. 직원이 하는 중국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어색하게 웃으니 내게 중국어 할 줄 아냐고 물어봤다.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아니???하고 대답했더니 영어로 친절하게 응대해줬다. 그만해...! 이런 엄청난 친절함 난 원하지 않아...!! 제발 날 모른 척 해줘...!!!! 결국 열린 마음으로 모든 케이스를 꼼꼼히 스캔했건만 내 취향에 맞는 걸 찾을 수 없어 게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다행히 비는 거의 그쳤다. 그 동네는 마치 합정동이나 홍대 혹은 삼청동의 트렌디한 샵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너무 익숙해서 편안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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