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 Day. 10
잠시 디화제에 다녀와서 쓰다. 체감 온도는 여전히 46도.
습도가 너무 높아서 오 분 돌아다녔더니 땀범벅이 되어 한 시간도 안 되어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주변에 조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물을 아무리 마셔도 어지러워서 일단 멈췄다. 오늘은 어제 계획한 대로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에 먼저 들른 다음에 디화제에 마실가려고 했는데 가는 길에 죽을 것 같아 그만 뒀다. 몇 년 전 앙코르 와트에서 조상님 잠깐 만나뵙고 왔는데, 오늘도 살짝 뵙고 온 느낌이었다.
호텔까지는 우버를 불러 타고 왔는데 이상하게 차가 너무 천천히 오는 거였다. 차가 밀리나보다 그러고 말았지. 백발이 근사한 중년의 기사님이었다. 아마도 은퇴 후에 우버 기사로 일하시는 거 같았다. 영어도 능숙하게 하시고. 아주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서 천천히 오신 거였다. 운전 중이라 그 분의 얼굴은 잘 보지 못했지만 입가에 계속 미소를 띠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하니 어디서 왔냐고 이번이 처음 대만 여행인지 물어보셨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며 나 홀로 왔다고 하니까 대단히 멋지다고 하셨다. 올 여름에 혼자 여행 다니는 여자를 멋지다고 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당연히 그냥 하는 소리인 걸 아는데도 그냥 고맙다.
차가 밀리는 대로에서도 해지는 걸 보라고 알려주신 기사님은 어쩐지 우리 아빠를 생각나게 했다. 아마 아빠도 이런 모습으로 나이를 들어 가셨을텐데. 목적지 부근의 좁은 골목에 차가 많아서 그냥 아무데서나 내리려고 하니까 위험하니 안 된다고 다 왔으니 기다리라고 해서 막 웃었다. 한국 사람들이 성질이 급하다는 것을 몸소 겪게 해준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그분의 배려에 더위에 지친 마음이 풀렸다.
땀에 온통 다 젖은 옷을 세탁하고 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니 배가 고파서 토마토 치즈 라멘을 먹으러 왔다. 이게 왠 괴이한 조합인가 싶었는데, 이 근방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식당이란다. 8시 반이 넘었는데도 금요일이라 그런지 대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우육면 및 덮밥은 못 먹겠다. 맛이 없는 건 아니고 그냥 조금 질렸다. 모스 버거를 갈까 했는데 거긴 좀 너무... 젊은 아가들이 많을 것 같아서 패쓰했다. 토마토 치즈 라멘은 괴랄한 맛일 줄 알았는데 심각하게 맛있었다. 출국 전에 한 번 더 가고 싶다.
금요일 밤, 타이베이의 젊은이들이 너무 흥분하는 것 같아 밀크티를 사들고 일찌감치 호텔방으로 들어왔다. 이 양반들 얌전한 줄 알았더니 불금에는 다를 바 없군. 하지만 길거리의 청년들만 흥분하는 건 아니었다. 깊은 밤이 되어 넷플릭스로 <윌 앤 그레이스>를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가 징징대는 소리인 것 같았다. 같은 층에 어린 아이와 함께 투숙하는 부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아이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 바로 그 소리였다. 타이베이의 한복판에서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쾌락을 즐기는 순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정말 난감했다. 이어폰 끼고 드라마를 봐야지, 생각하려는 찰나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엇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일본 AV랑 완전 똑같잖아??
격렬하게 이 순간에 몰두하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여긴 동아시아의 유명한 관광지고 오늘은 금요일 밤이고 이 호텔은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으니까. 정말 이상한 것은 그녀가 내는 소리가 AV 배우들이 내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단정을 짓는 거냐고 너무 자세하게 따지지 말아 달라...
민망함에 실소가 나온 것도 잠시,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의문점이 들었다. 어떻게 저 여자는 동영상에 나오는 배우들과 똑같은, 아주 과장된 소리를 낼 수 있는 거지? 나의 가설은 이러했다.
1. AV배우가 휴가를 왔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2. 여성이 AV를 자주 접해서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익힌 버릇이다.
3. 함께 하는 남성이 그런 환타지가 있어서 여성이 기꺼이 흉내내는 것이다. 원래는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4. 이렇게 해야 남성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연기하는 것이다.
5. 누가 동영상을 틀어 놨다. 가장 반전인 해답이다.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붙잡고 물어보지 않는 이상은. 물어본다고 해도 솔직히 대답해줄 리도 없고 말이다. 어찌 됐든 본인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결정이었으리라 믿고 싶다.
열 번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