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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혜 Jun 15. 2021

세기말 텐트와 함께 캠핑을 시작했습니다.

세기말 텐트로 시작된 취미 캠핑 - 01

“엄마랑 아빠는 이제 귀찮아서 캠핑 안가. 텐트 네가 가져갈래?” 


우리 집의 유산은 텐트였다. 그것도 1999년 세기말 텐트. 드라마를 보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나 보석 박힌 회중시계, 원목으로 만든 피아노 같은 우아한 귀중품을 자식에게 주던데. 내가 받은 우리 집안의 유산은 텐트였다. 폴대와 텐트 스킨 무게를 합하면 족히 20kg이 넘는 그야말로 빈티지 텐트. 세기말 텐트의 폴대는 내 팔뚝만큼 두꺼웠다. 설치는 또 얼마나 복잡한지 캐빈하우스 형태로 지붕 폴대 세 개를 나란히 정렬시키고 앞과 중간 끝에 기둥 폴대를 하나씩 끼워 세워야 한다. 그러니까 기둥 폴대만 6개. 혼자 기둥을 끼우면 무너지기 일쑤라 솔로 캠핑은 꿈도 꿀 수 없는 녹색 세기말 텐트. 텐트 스킨의 방수 코팅은 2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며 구석구석 벗겨졌다. 기능도 쇠약해 비가 오면 이너텐트까지 물이 물이 떨어져 코펠과 그릇으로 물방울을 받아냈다. 캠핑이 하고 싶으면 그냥 텐트를 새로 사라고 했지만, 나는 가문의 유산! 녹색 1999년 세기말 텐트를 버릴 수 없었다. 


그때였다. 내가 캠핑을 취미로 시작한 게. 캠핑을 왜 좋아했을까? 아니 캠핑을 좋아하긴 했었나? 알 수 없지만, 세기말 텐트도 생겼으니 일단 캠핑을 해보자고 반려인을 설득했다. 세기말 텐트와 함께 2000년대 초 부모님이 구매한 코베아 캠핑 테이블도 넘겨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유산이 하나 더 있었네. 코베아 캠핑 테이블. 마침 생일이었는데, 부모님은 집 안에 공간을 차지하던 텐트를 처분하게 해 준 내게 고마운 마음이었는지 선뜻 생일 선물로 릴랙스 체어를 선물했다. 붉은기가 많은 와인색 코베아 릴랙스 체어였다. 


그해 여름 반려인과 나는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녹색 세기말 텐트, 붉은 기가 많은 와인색 릴랙스 체어, 마찬가지로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진 빈티지 코베아 캠핑 테이블을 챙겨 들고 동해로 향했다. 첫 캠핑지는 망상해수욕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캠핑 장비도 제대로 없으면서 캠핑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캠핑장이 아니라 바닷가 노지 캠핑을 첫 캠핑으로 떠났다는 게 놀랍다. 사실, 철이 덜 들었던 때라 텐트칠 땅 고작 5-6평을 빌려주는데 몇 만 원씩 내야 하는 캠핑장이 불만이었다. (아니다.) 그래서 그냥 바닷가 가서 깃발 꽂으면 내 땅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진짜 아니다.) 


무튼 7월 말,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려 꽂히는 망상해수욕장 바닷가 모래에 깃발, 아니 팩을 꽂았다.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블랙 코팅은 만무하고 방수 코팅 기능도 상실한 지 오래인 세기말 텐트를 처음 피칭했다. 앞과 뒤가 헷갈려서 지붕 폴대 방향을 세 번인가 바꿨다. 무너지지 않게 기둥 폴대를 끼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한쪽 기둥을 세우면 반대편 지붕이 무너졌고 그 지붕을 다시 끼워 기둥을 세우려 하면 중간 지붕이 무너졌다. 여차저차 세기말 텐트와 한 시간 여의 씨름 끝에 텐트 설치에 성공했다. 텐트 그늘 아래 바다를 향해 테이블과 릴랙스 체어를 폈다.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의 차가운 푸른빛과 하얀 백사장을 바라보자 이내 눈이 시려왔다. ‘꼬르륵’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7월 말 땡볕에서 그늘도 없이 20kg이 넘는 텐트와 싸운 결과다. 노동한 자는 먹어야 한다. 


첫 캠핑에서 우리는 밥을 해먹을 버너도 없었으며 그릇도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텐트, 테이블, 의자뿐이었다. 다행히 성수기 망상해수욕장에는 먹을거리를 많이 팔고 있었다. 커다란 마트도 있고, 치킨집도 있었다. 마트에서 맥주와 마실 물을 사고, 치킨 집에서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포장했다. 


‘딸깍- 촤아아악’ 캔맥주 입구를 열어젖히니 시원한 탄산이 구멍 위로 솟구쳤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끝내고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괜찮은 치킨이었다. 성수기 여름 망상해수욕장에서 살아남는 치킨집이라니 그래 맛이 없으면 어렵겠지. 한 손에 치킨을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배를 채우는 동안 불덩이 같던 뙤약볕의 온도는 서서히 낮아지고 차가웠던 생수는 태양이 달군 모래의 지열로 뜨끈한 온천수로 변하고 있었다. 배를 채우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연거푸 맥주만 마셨다. 맥주가 떨어지면 해수욕장 입구 마트에서 맥주를 리필했다. 밤이 찾아오니 해수욕장 여기저기서 마트에서 산 폭죽으로 불꽃놀이를 터뜨렸다. 불꽃이 3초도 가지 않는, 불꽃이라기엔 힘없고 유약한 그 불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싸. 공짜 불꽃놀이다. 나는 폭죽 안 샀는데’ 더 깊은 밤이 오니 불꽃놀이도 멈추고 바람과 별과 파도와 모래 그리고 맥주만 남았다. 철썩. 파도 한 번에 맥주 한 입. 철썩. 파도 한 번에 또 맥주 한 입. 파도를 벗 삼아 맥주를 들이켜다 보니 새벽이 다되었다. 


새벽 여섯 시에 눈을 떴다.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 한 여름에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캠핑을 하면 그 어떤 저녁형 인간이 와도 새벽 여섯 시에 눈을 뜨게 되어 있다. 덥다. 더워서 눈을 뜬다. 블랙 코팅이 없는 땡볕 아래 텐트는 인간 온실이다. 태양 에너지를 머금은 텐트 속 열기는 상상에 맡기겠다. 땀을 삐질거리며 지퍼를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여름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지난 새벽 맥주를 마시며 들었던 파도 소리와는 또 다른 경쾌한 아침의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눈꼽을 떼고 근처 화장실에서 대충 양치와 세수를 했다. 철수할 시간. 힘겹게 사투를 벌이며 일으켜 세운 텐트를 다시 무너뜨리는 시간. 밤사이 내려앉은 이슬을 잠시 말리고 철수에 들어갔다. 이너텐트며 폴대마다 고운 모래가 그득했다. 해수욕장 주차장에서 커다란 텐트 끝과 끝을 반려인과 붙잡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흔들어가며 모래를 털어냈다. 폴대까지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배가 고파왔다. 근처 식당에서 배고픔을 달래고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를 켰다. ‘캠핑 필수품’, ‘캠핑 용품 싸게 사는 법’을 검색했다. 취미 캠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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