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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insing Dec 30. 2019

'바나나 대학살'과 운명에 관하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남미에 있으니 구글 배너에도 남미와 관련된 내용이 뜨나보다. 


그저께 나에겐 낯선 한 작가가 구글 배너에 올라와 있었다. 배너에는 흥겹게 생긴 남미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무심코 배너를 클릭하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27-2014)'라는 작가의 프로필이 떴다.

그는 '백년의 고독'이라는 작품으로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 작가로 '백년의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통해 중남미의 역사를 그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 뭐 워낙 남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매우 한정적이라서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의 작품 리스트를 보다가 문득 '바나나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읽으면서 참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일들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건은 이렇다. 

미국의 'United Fruit (이후 치키타 바나나로 브랜드명을 바꾼다)'이라는 회사는 1927년 당시 콜롬비아에서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농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하게 되고, 
미국의 압력을 받은 콜롬비아 정부는 바나나 농장에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1928년 12월6일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시에나가시 광장에 모인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을 향해 콜롬비아 군대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대치를 했고, 광장을 5분 이내에 비우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사격이 시작됐다. 

마르케스는 소설에서 이 역사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14개의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처음에는 굳어버린듯 아무런 반응도 비명이나 한숨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중략)

무자비한 군대는 무릎을 꿇은 여자와, 그 여자가 있던 곳과 높고 가뭄에 찌든 하늘과, 너저분한 터전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 당시 사망한 노동자의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수십명에서 3천명 가량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우리가 모르던 이 땅에서도 벌어졌구나 하면서...

그 사건 이후 약 50여년 후 광주에선 5월21일 오후 1시에 전남 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러 퍼졌고, 이를 신호로 군인들의 사격이 시작됐다. 

인간의 잔학성은 패턴을 바꾸지도 않고, 똑같은 일들을 수십년간 대륙을 옮겨다니며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렇게 잔인한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잔인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인간은 살아 남아서 그때 벌어진 일을 다시 정리하여 그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영화 '남한산성'에는 한 늙은 사공에게 강을 건너는 길을 안내받은 예조판서가 오랑캐에게 길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리도 없이 그 사공을 칼로 베어버리는 무참한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사공의 손녀 '나루'가 그 험한 남한산성을 올라와 왕에게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고가 되고, 소리도 없이 사공을 벤 예조판서에게 그 아이를 맡아 돌보라는 어명이 내려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런 운명은 막을수도 피할수도 없는 것이다. 

마치 바나나 학살을 자행했던 그 콜롬비아 정부나 군인들이 마르케스와 같은 소설가가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전세계 독자들에게 폭로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운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기가 막힌 것이다. 




▼ 나는 1984년 2월에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니, 어떤 동창은 본지 이제 34년이 지난 셈이다. 

지금껏 싱가포르에서는 동완이를 만났고, 도쿄에서는 주일 특파원이었던 상하를 만났다. 

얼마전 중학교 여자 동창 3명이 싱가포르에 놀러 오기도 해서 나는 꽤나 많은 동창들을 해외에서 만났다.

브라질에 출장을 올 기회가 처음 생겼을 때 용철이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정이 빡빡했고, 2011년 이후에 처음으로 온 브라질이었기 때문에 좀 더 업무에 집중하자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장을 마치고 용철이 문자를 받았다.

기쁜 마음에 답장을 했고, 34년 만에 그를 만났다. 

용철이는 와이프와 함께 나를 데리러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와줬고, 근사한 슈라스카리아로 나를 데리고 갔다.   


▼ 풍성하고 싱싱한 브라질 음식들과 용철이 부부의 환영으로 너무나도 기분 좋은 저녁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용철이가 나를 데려간 '바바코아'라는 슈라스카리아는 특별했다. 

용철이는 95년에 결혼을 해서 23년간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 느낌에는 결혼한지 5-6년 된 부부같다는 느낌이었지만 ^^

저녁 식사를 시작한건 7시쯤이었지만 얘기를 얘기를 하다가 얘기를 마친건 거의 11시반이 다 되서였다. 


▼ 매사에 당당했고, 때로는 밀어부치기를 좋아했던 용철이었지만, 그리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꼭 하면서 어렵게 굴던 나였지만 이제는 아저씨가 되어 아저씨 토크를 하며 남편을 따라 나선 그의 와이프에게 재미난 얘기를 한다. 

용철이가 그의 세 딸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와이프에게 뭔가를 조근조근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더 영락없는 아저씨다. ^^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었다. 

▼ 총칼로 무장하고 바나나 농장의 농민을 해한다고 해도, 길을 잘 알고 있는 사공을 무참히 해한다고 해도 농민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려 하는 작가의 몸부림이나 할아버지를 찾아 높은 산성에 오르는 '나루'의 발걸음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학교가 폐교가 되더라도 그 학교를 다니던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출장을 기회삼아 그때 함께 학교에 다니던 친구를 만나는 우연 또한 아무도 막지 못한다. 

얘기가 조금은 무겁게 흘렀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였다.

용철아, 저녁 잘 먹었고, 너무너무 고마웠다. 

비록 출장이 연기되서 다음 주에는 아르헨티나에 가서 3주를 더 지내야 하지만 그전에 기회가 되면 더 만나고 아르헨 다녀와서 보자. ^^

By 켄 in 상파울루 with 용철


'18년 3월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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