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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란지교 Jan 12. 2021

나는 그만뒀지만, 그는 그만둘 수 없었던 것.

진로 유목민(3) 

날카롭고 짧은 첫 사회경험 속에서 최종적으로 제일 크고 값진 깨달음이 있었다.

 '노동'에 대한 거룩함이었다. 


피곤한 회식 후 원룸에 들어와 털썩 주저앉은 후, 술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나약하다는 핀잔을 들을 것 같았지만, 그냥 갑자기 엄마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아빠는 의외의 반응을 하셨다.


"괜찮아, 그만둬! 아빠가 있잖아!"
 

그 말이 새벽 내내 나를 울게 했다. 17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말이다. 아빠가 굉장한 "빽"이 있는 사람이라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딸이 울면서 일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두는 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 사람은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경이로웠다. 몇 개월도 너무나 죽을 것 같이 힘들었는데, 그에게는 어떤 초인적인 힘이 있었길래 몇십 년을 해왔을까? 


내가 그동안 누렸던 안락함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아빠의 체념과 눌러 담음, 자기부정이 켜켜이 쌓여 이뤄낸 시간들이었다. 그는 더한 모욕감과 치사함을 겪으면서도 30여 년을 버텨왔다. 하지만, 왜 아빠라고 해서, 때려치우고 싶었던 순간이 없었겠는가? 


아빠는 이직을 한 적 없으시고, 할 수도 없는 직업이었다. 그는 육군 장교셨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그의 사회생활은 내가 발 담가 본 사회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힘들고 고됐을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다른 꿈을 꿔 본 적이 없었을까? 다른 진로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까?   


생각은 해 보셨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가 그렇듯 그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당장 짹짹거리는 아기새가 둥지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먹이 찾기는 무조건적으로 실행되어야 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천적이 에워싸도 나가야만 했다. 


그랬던 그가, 나도 그랬으니 너도 참고 다니라고, 원래 사회는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만두라고 했다. 자기가 더 먹이를 먹여줄 터이니, 너는 해보고 싶은 것을 더 찾아보라고 했다.  


내가 노동을 해보니, 그제야 그의 노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내 입으로 들어오는 먹이의 감사함과 거룩함이 느껴졌다.  


감사하고 죄송했지만, 염치 불고하고 난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시원하게 때려치우며 살았다. 내리사랑이라고, 조금 더 그의 내려오는 사랑을 더 받기로 했다. 그의 꿋꿋한 정착 생활 덕분에, 나는 더 진로를 유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오늘도 무조건적으로 부양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가장들(남녀 불문), 당신의 노동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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